RARITYCOMMON
KOREAN C.V.한경화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잡귀작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불행의 씨앗들.한 곳에 묶여있는 귀신이나 원한을 갖고 죽은 사람의 영혼 등을 모두 잡귀라고 부른다. 가야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존재들. 평범한 날이었다. 다른 날과 단 한구석도 다를 거 없던 날. 밤에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당연했다. 힘든 나날이기도 했으니. 살고 있던 집에서 직장이었던 백화점까지 걸렸던 시간은 무려 1시간 반. 심지어 매장을 담당하고 있던 그녀는 백화점 메뉴얼에 따라 또 매장 메뉴얼에 따라 화장도 해야 했다. '하....' 때문에 6시에 일어나야 했다. 준비하는데 한시간, 도착하는데 한시간 반. 그래도 매장 도착해서 오픈 준비하고 뭐 하다보면 빠듯했다. "그거 들었어?" "뭐요?" "아니, 어제 여기 식당가.... 거기 뭐 바닥에 구멍이 났다는데?" "정말요? 그거 괜찮은거에요?" "모르지. 근데 괜찮으니까 나오라는 거 아닐까?" "하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같은 처지의 언니의 존재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네에 살던 언니는 열심히 일하고 또 아껴서 모은 돈으로 가까이 이사를 하지 않았나.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곧 점장으로 승진할거란 얘기도 돌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을까? 그런 사람이 괜찮을거라 하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일단 준비나 하자." "네, 언니." "그래." 게다가 언니가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쓰다듬어 주니 용기도 났다. 그래,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을 해보자.해보자.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오픈 시간이 되고, 열심히 응대에 나섰다. 운이 좋은 날이란 생각도 들었다. 보통 매장에 들어선 사람들 열명 중 하나만이라도 물건을 사면 다행이다 싶은데, 그 날은 무려 절반이 넘는 사람이 샀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뭐할거야?" 곧 퇴근시간이었다. "그냥 집 가서 대충 먹고 자려고요. 언니는요?" "나? 나 얼마 전에 남친 생겼잖아." "아, 맞다! 와.... 그럼 오늘 데이트해요?" "응. 데리러 오기로 했어. 어?" "왜요?" "왜 벌써 왔지?" 언니 남자친구가 왔다. 데리러 왔다는데, 한껏 꾸미고 와서 그런가 아니면 원체 인물이 좋아서 그런지 눈 앞이 살짝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찌지직 그리고 무언가 찢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착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모두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윗 층에 있던 식당가에서 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빨리! 빨리 다 나가!" 나가? 무슨 소리지? 멍한 얼굴로 보고 있으려니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사람들이 몰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어...." "언니?" "이, 일단.... 우리도 나갈까?" 언니의 말.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이럴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어둠이 덮쳐 내렸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언니도, 남자친구도 보이지 않았다. "박지현, 24세. 00월 00일 00시 사망."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몇초? 몇분? 몇시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눈 앞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창백한 사내 하나가 손을 잡아 끌었다. 거부할 새도 없이 그저 그를 따라 하늘 위로, 그러니까 잔해 위로 올라갔다. 바닥에 남은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바쁘다, 오늘은 너무 많이 죽었어."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사내가 말했다. 아니, 저승사자가 말했다. 그 말에 옆을 둘러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창백한 사람의 손을 잡고 끌려 가고 있었다. "어, 언니." 언니도, 남자친구도 있었다. 이상하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죽었다는게. "왜 멈추느냐. 가야한다." "안되요." "뭐가.... 안된단 말인가. 이미 죽었다. 이제 강을 건너면 새로운 삶이.... 야! 돌아와!" 안돼. 그저 안된단 생각만 들었다. 죽어? 죽는다고?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하고 싶은 것 참으면서 일을 하고. 갖고 싶은 것 참으면서 돈을 모으고. "이년이....." 뒤를 돌아보니 저승사자가 그야말로 저승사자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죽음. 그 자체로 생각이 되었다. 정신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복잡한 도시 내에서. "아, 여기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준비 되지 않았던 죽음이 너무 많은 날이었던지라 도망가는 영혼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잡혀 돌아갔다. 허나 운이 좋은 이들도 있었다. "하." 잡귀가 그랬다. 열심히 살아온 삶 끝에 찾아온 죽음. 그것만으로도 한이 차오르는데,나중에 언론 보도를 보다가 들은 말. 그 말 한마디가 잡귀의 한을 더 피어 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거야. 재산? 재산이라고 했나?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이 멀쩡하게 살아서 그런 말을 해? 죽여야 했다. 허나 잡귀가 되면서 흐려진 눈은 원수를 찾기 어렵게 했다. 비슷한 놈이 있어 해치고 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몇번 실수가 이어지자 이제 잡귀는 수배 대상이 되었다. 자신을 쫓는 저승 사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괜찮았다. 난 그 놈만. 원수만 갚으면 되니까. "잡귀, 오셨군요." 헌데 이상한 곳에 왔다. "나.... 난 이런데 있을 시간이 없어!" 플랫폼? 암만 눈이, 귀가 흐려졌다 해도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스트로크 현상이라는 거, 돌아다니다 보면 들을 수밖에 없는 얘기니까. 하지만 내가 왜? 그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난 대단한 놈이 아니라고! 나는 그냥.... 그냥...!" "선택된 것은 당신입니다." "날 선택하지 말라고....." "이 곳에서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당신의 존재나 당신의 앞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 미래는 하나야." 그래. 그 날 이후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언니와 그녀의 남친 그리고 잡귀 본인을 죽게 만든. 그 외에 죄 없는 수백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반성은커녕 돈 걱정만 하던 그 놈. 그 놈의 죽음 외에 잡귀가 꿈꾸는 미래는 없었다. "모를 일이죠." "모르지 않아. 가지마! 날 다시...." 허나 잡귀의 말과는 별개로 안내인은 슥 하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잡귀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뭘...." 원수 놈도 왔을까?아닐 거 같았다. 그럼 빨리 돌아갈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한을 품은 후 단 한번도 명확하지 않았던 내일의 일이 처음으로 물음표가 되었다. 도저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