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병장
RARITYCOMMON
KOREAN C.V.김기철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절대권력자.하나의 세계를 모두 경험한 위대한 존재이나, 뜨거웠던 심장은 차갑게 식고 강철같은 육체는 노쇠해지니 끝없는 권력은 곧 무로 돌아간다."좆같이 덥네...." 웃통을 까고, 한창 삽질에 열중하던 상병이 욕설을 내뱉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욕나오게 더운 날씨이긴 해서 그랬다. "저 새끼들은 생각이 없나...." 상병은 입이 열린 김에 본격적으로 털기 시작했다. 삐뚜름한 시선으로 이 지시를 내린 행보관을 노려보면서였다. "뻔히 폭염 주의보 내린 거 알면서도 이러네. 내가 진짜 전역하기 전에 저 새끼 진짜." 점점 선을 넘나드는 느낌이 일었지만, 가장 가까이 있던 병장은 은근히 응원한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일병도 욕설을 거들었다. "그때 저도 불러주십쇼." "넌 인마 전역 전에 그랬다간 영창 가." "복면 쓰고 후리면 되지 말입니다." "미친놈이." 뭐라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행보관을 물고 뜯고 씹었다. 아닌게 아니라 행보관은 이전부터 터무니 없는 명령으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지 않던가. 이 자리에서는 욕이 안나오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팍 그 와중에 묵묵히 삽질만 해대는 이가 하나 있었다. "천공기 병장님." "응?" 천공기. 병장. 그 중에서도 전역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말년 중의 말년. "병장님은 화도 안나십니까?" 지금까지 뒷담화를 주도해 왔던 상병이 물었다. 딱히 동조를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천공기는 그야말로 군인 그 자체였으니. "까라면 까야지." 그래. 까라면 깐다. 이것이야 말로 천공기의 인생 모토였다. "그래도.... 전역 일주일도 안남으셨는데 이짓하시면 열 안받습니까?" "난...." 천공기는 그제야 삽질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숙이고 있던 허리가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병장 답지 않게 짧게 자른 머리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 나왔다. '화가 나야 하는건가.' 깊이 생각해보면 그래, 이 삽질 자체가 별 의미 없는 짓이긴 했다. 장마 지나간지가 언젠데 수로 공사를 한단 말인가. 지시하는 사람도, 그 지시를 받는 사람도 의미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그야말로 세간에서 말하는 삽질 그자체였다. '시키면.... 한다. 그게 군인 아닌가?' 군대라는 곳이 삽질의 연속 아니던가. 돌이켜 보면 지난 2년은 삽질의 총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몰매 맞을까봐 가만히 있었지만, 천공기는 그게 좋았다. 밖에선 뭘 자꾸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는데, 여기서는 시키는 일만 하면 에이스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래, 뭐. 화가 안나진 않지." 물론 여기서 분위기 파악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상병은 그런 천공기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래,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 뭐 그런 얼굴이었다. "다행이네요." "뭐가?" "전역 얼마 안남으셔서 드리는 말이긴 한데.... 천공기 병장님은 지금까지 열외 한번도 안하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밑에 기수들은 뺑끼치고 들어가 있는데 말입니다." 상병은 생활관 쪽을 가리켰다. 아닌게 아니라, 천공기 하나 아랫기수는 저기 누워 있었다. 행보관이 아무리 악질이라고 해도 전역 한달 남은 사람을 불러다 삽질을 시킬 정도는 아니어서 그랬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고 설레발 떠는 놈들 괜히 일 시키다가 다치면 어쩐단 말인가. -공기야, 너도 들어가 있어. 천공기도 사실 열외를 지시 받긴 했다. '나는 딱히.... 전역이 간절하지는 않단 말이지....' 허나 천공기느 나와서 삽질을 맹렬히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또 잘. '그렇다고 말뚝 박기는 싫고.' 느낌은 왔다. 부사관들이 말뚝 박길 원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천공기도 솔깃하기는 했다. 생애 처음 에이스 취급을 받았으니까. 막말로 이런데가 세상 천지에 어디있단 말인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에이스 취급을 받고, 또 시간만 채우면 진급할 수 있는 곳이. 하지만 어쩐지 세상에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좀체 사라지질 않았다. "난 뺑끼 치는게 성격에 안 맞아서." 그렇다고 또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마다 복병처럼 다가와 가슴을 푹 찔렀다. 그게 천공기가 열외도 마다하고 밖으로 나와 삽질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팍 그렇게 다시 삽질을 시작하고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공기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이명인가? 사격하고 나면 종종 들리던?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할까. "야, 방금 뭔 소리 못 들었냐?" "네? 아뇨?" "아닌데? 들렸는데?" "천공기 병장님도 이제 전역할 때 되셨지 말입니다. 농담도 다 하시고." 해서 남들에게도 물었으나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짜고 놀리는 건가? 그럴 수는 없었다. 적어도 군대에서 만큼은 천공기를 그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었으니까. -띠리링 그때 또 다시 소리가 울렸다. 아까는 그저 웅웅거리더니만, 이제는 제법 소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건.... "야, 누가 뭐.... 기타? 아니, 하프? 하여간 뭐 치는 거 아냐?" "네? 무섭게.... 왜 그러십.... 어, 어어. 병장님!" 다시 물으려 할 때쯤, 소리가 또 다시 울렸다. 밖이 아니라, 몸 속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 갑자기 이게...." 다시 눈을 떴을 땐, 연병장이 아니었다. 의무실도 아니었다. 그저 공간이었다. 새카만 공간.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여기.... 내가 미친건가....' 천지사방이 돌아가고 있었다. 익숙한 풍광도 그렇지 못한 풍광도. 모든 곳이 한데 뒤섞여 사라지고 또 생성되는 광경이 천공기의 눈을 사로 잡았다. "말년 병장 천공기. 맞습니까?" 그때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남자 같다면 남자 같고, 또 여자 같다면 여자 같은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과연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는 존재가 서 있었다. "누구.... 누구냐, 넌." 천공기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경계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두 손엔 삽이 한자루 들려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어쩐지 든든했다. 이거 하나로 지난 2년을 버텨오지 않았나? 뭐든지 라고는 못해도 어지간한 일은 이걸로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과연, 삽인가요." "무슨...."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상대는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섞이던 배경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동시에 딱 천공기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 같은 처지라는걸. "어떻습니까? 저희가 마련한 무대가." "무대라니. 뭔.... 아." 스트로크. 천공기는 한창 뉴스에서 떠들썩 했던 사건을 떠올렸다. 설마 싶었으나,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난.... 난 고작해야 말년병장인데?" "그렇죠.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아니, 내가.... 내가 여기서 뭘.... 뭘 할 수 있다고." 삽?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거대한 우주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것이 스트로크. 코딱지 만한 부대에서 에이스 취급 받던 천공기가 먼지가 되어 흩날려도 이상할 것 없는 세계. "자, 그럼 당신의.... 이야기를 보여주세요."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 천공기에게 상대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의지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삽.... 시발.... 이게 다냐?' 이 넓은 우주에 달랑 삽 하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훈련병 때도 그랬다. '까짓거.... 까보자.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