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RARITYCOMMON
KOREAN C.V.홍진욱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공포와 관용의 고독한 지배자.자신이 머물고 있는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영적인 동물로서 산군이라고도 불렸다. 어둠에 잠긴 산에서 두개의 불꽃을 보았다면 산의 주인을 마주한 것이다.잘려나간 나무. 파헤쳐진 계곡. 아무렇게나 버려진 동물들. "흐...." 또 하나의 산이 죽어가고 있었다. "인간...." 산군은. 아니, 산을 잃은 군주에게 산군이라니. 지나친 허명이었다. 그래, 호랑이. 호랑이는 두 눈을 잘게 빛내며 산 밑을 노려 보았다. -우우웅 이미 짙게 깔린 어둠이 자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별 망설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낮보다도 더 기민하게 움직이는 듯 했다. 잘려버린 나무 밑둥을 기묘한 철로 밀어내고. 꺼지지 않는 불로 어둠을 밀어내, 날짐승을 깨워 내쫗고 있었다. "으르르르."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호랑이는 좀처럼 앞으로 발길을 내딛지 못했다. 분노보다 더한 두려움이, 공포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안돼!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늘 아래 모든 산마다 산군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산군은 산에 출입하는 모든 존재를 발 아래 두었다. 그 중 산에 속하지 않은 것들. 즉 인간들에게는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배고픔에 떨던 이에게는 고기를 주기도 하고, 숫제 등을 내어 주어 고개를 넘게 해주기도 하고. -안돼...! 물론 도움만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히 산군을 해하려 오는 이들도 있었기에 그랬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발 아래 있는 날짐승을 지나치게 해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부정한 것을 벌하는 것. 그것 또한 산군의 일이었으니.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동류가 타락하여, 마을을 침범해 인간을 잡아 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디 산군이 만만한 상대라던가. 오히려 사냥에 나선 이들이 더 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그들을 벌하는 것 또한 산군의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산군은 인간들과 더불어 수천년을 지내온 셈이었다. -탕 호랑이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헉. 헉...."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산이었다. 아니, 이제 산이 아니라 흙더미일까? 어찌나 정신없이 도망쳤는지, 윤기가 흘러야 할 가죽이 온통 더렵혀져 있었다. 그럼에도 호랑이는 서글프다는 감정보다는 다행이란 생각만 했다. 죽지 않았으니까. -탕 어느날 인간들이 들고 온 쇳덩이. 그 쇳덩이에서 내뿜어 대던 불, 그리고 작은 쇳덩이. 그날부터 산은 더이상 산군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산군을 잡아 죽였다. 마치 처음부터 철천치 원수라도 되었던 것처럼. -너.... 너는...? 그중엔 개인적으로 은혜를 베풀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인간 또한 미안하다는 기색 조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호랑이가 뒷다리를 이따금 저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그나마 호랑이는 처지가 나았다. 다른 이들은 다 죽었으니. 정말 하나 뿐이었다. 이 땅에 남은 호랑이는, 산군을 자처했던 이는 이제 홀로 남아 흙 위에 누웠다. '차라리.... 죽자.' 복수? 꿈꾸었던 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숫자도 늘어나기만 했고.심지어 산을 점점 깎아 나가고 있었다. 비루하게 살아 이 꼴을 볼 줄 알았다면, 그날 도망치지 않았을 터인데. "후...." 호랑이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곰방대를 물었다. 고색창연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저 낡은 나무 막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담배가 아닌 독이 담겨 있었다. 그래, 이제 마지막이다. 이렇게 죽자. -띠리링 그때 호랑이는 들었다. 생전 처음 드는 소리였으나,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산을 잃은 지 오래이나, 한때나마 신성한 존재였던 호랑이는 무언가 존귀한 존재가 그를 부르고 있음을 알고 곰방대를 살며시 내려 놓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음...." 마침내 소리가 내면을 울리고, 호랑이는 흙더미가 아닌 어딘가로 불려갔다. 당황하진 않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권능의 편린 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스트로크...." "산군이 오셨구려." 비남비녀(非男非女)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산군으로서도 처음 보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대가 나를... 아니, 아니군. 그대는 안내자로구나." 산군은 턱을 치켜든 채, 안내자를 바라보았다. 안내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하나 남은 산군 답구나.' 누군가는 이를 두고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이라 일렀으나. 뭐가 되었건 일족의 마지막을 지키는 이는 무언가 특별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안내자는 스트로크의 선택에 또 한번 놀라움을 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대의 안내자입니다." "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안내자는 손을 흔들었다. 부정의 뜻이기도 하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자 뿌옇던 배경이 사라지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군 만은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주변에 있던 이들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이.... 있구나." 그냥 인간도 아니고, 군복을 입은 인간이었다. 저 비슷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료를 잃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산을 잃었던가. 눈에 분노가, 또 광기가 서렸다. "총을 지닌 인간도 있느냐?" 산군의 물음에 안내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허면 내가 저들을 찢어 발겨도 좋느냐?" "정해진 것은 없다....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좋다." 안내자의 말에 산군은, 한 때 그가 사냥했던 타락했던 이들의 눈이 되어 말년병장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안내자는 진흙이 잔뜩 묻은 산군을 지긋이 바라볼 뿐 이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이 곳에서의 행동 지침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다만 행동의 대가는 오롯이 그의 몫이 되겠지만. '진정한 산군이라면.... 달리 움직일수도 있겠지요.' 안내자는 섯부른 조언을 내뱉는 대신 그저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