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COMMON
KOREAN C.V.윤소라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망나니슬픈 처형인.죄수의 목을 베는 죄수. 죄인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죽음을 미룬다. 타인의 삶을 끝내야 하는 고통을 취기로 감춘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사형 집행관의 말에도 선비의 고개는 좀체 들릴 줄을 몰랐다. 도리어 고집스레 고개를 숙였다. 하늘을 보기 부끄러워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떳떳하기만 했다. "무엄하도다! 죄인은 어명을 받들어 고개를 들라!"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집행관이 왕의 위엄까지 빌어왔으나, 선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망나니 소향이 입을 벌리지 않은채 말했다. "이래봐야 그대만 고통스러워질 뿐이외다." 그녀는 안타까웠다. 선비의 종적을 모르지 않아서 그랬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시대에 뒤쳐졌다는 것일까? 왕도, 세상도 타락해 군자와 선비를 원치 않게 된지 오랜데 홀로 선비임을 자처 하고 있으니 화를 면할 수가 있겠나. "망나니는 죄인의 고개를 들게 하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집행관의 명이 들려왔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할까. 잠시라도 머뭇거렸다간 당장 내일이라도 저 자리에 자신이 꿇어 앉게 될 것임을 소향은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저주 받은 짓거리를 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으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죄수들의 목을 벤다면 그만큼 너는 네 삶을 연명할 수 있을테니. 참으로 치욕스러운 제안이었으나 소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구차한 세상임에도 살아 남아야 한다는 부모의 유언 떄문이었다. "고개를 드시오!" 소향은 강제로 선비의 풀어헤쳐진 머리를 끌어 당겼다. 그러자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고아한 선비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히 구경하러 왔던 이들조차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젠가 조선이 꿈꾸었던 선비의 얼굴이 거기 있어서 그랬다. "네 놈의 죄를 네가 알렸다?" 집행관 만은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는지, 하고자 했던 말을 망설임없이 내뱉었다. 소향은 이제 이 선비가 고집을 꺾고 어서 죄를 고하기를 바랬다. 그래야 이 시간이 금세 끝날테니. 허나 선비는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나는 그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했을 뿐이요." 아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가슴을 편 채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집행관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죽었다 생각했던 양심이 찔려서 일까? 그는 불필요하게 분을 쏟아냈다. "이 미친작자가! 곱게 죽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아. 이런 제길. 소향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주어 넘겼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베어도 찝찝함이 가시질 않거늘. 이런 사람을 괴롭혀 죽인다면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망나니는 들으라." "네, 나으리." 허나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향은 집행관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열 번은 베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히 신성한 어명 앞에 불손한 모습을 보인 죄인에게 합당한 벌이 될 것이니!" "네, 나으리." 그리곤 춤을 추었다. 대도를 들고. 죄인의 곁을 맴도는, 죽음의 춤을. 뒤에 있던 악공들의 음악에 맞추어. 멜로디와 박자는 경쾌하기 짝이 없고, 또 망나니 소향의 춤사위도 여느 저자거리의 광대와 다름 없었으나 얼굴만은 비참했다. "으악!" 소향이 칼을 휘둘렀다. 단번에 목을 벨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옆을 슬쩍 베었다. 대쪽같던 선비가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집행관은 그 모습이 자못 흐뭇한지 무릎을 쳤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몇몇 아부하는 입들이 있어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흡!" 소향은 춤을 추다가 또 검을 내리 그었다. 그때마다 고아한 선비의 얼굴은 망가져갔다. 주변으로는 피가 튀었고. 망나니의 옷도 붉게 물들어 갔다. 벌써 9번째 검을 내리쳤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선비는 살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소향은 울면서 마지막 검을 내리쳤다. 열번째. 자그마치 아홉번의 목이 베이는 고통을 견디고 나서야 선비는 죽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떠났지만, 소향은 이승에 남아 고통을 되새김질 했다. "술이 넘어가나?" 맨정신으로는 무리였다. 해서 술을 청하니 주인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람 죽인 놈이 뭘 잘했다고 술을 먹나 싶은 모양이었다. 굳이 답하진 않았다. 말은 저리 해도 술은 내어주리라는 건 알았으니. '개같은 생이로다.' 아니, 개만도 못한 생이었다.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생을 연장하는 삶이라니. '아버지.... 저는....' 왕이 죽고, 세상이 뒤집어 지면.진짜 왕이 돌아오면 역적 혐의도 벗겨질거라는 말은 이제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희망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었다. 다만 옅어졌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지쳤다. 이래서야 역적 혐의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미 선비를 몇이나 죽인 참인데. -띠리링 그렇게 하염없이 술을 마시며 정신을 잃으려는데, 귓가에 어떤 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만 취기를 남긴 채, 어떤 공간으로 끌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눈 앞에 존재를 제외하면 정말 그랬다. "이 곳은 플랫폼입니다." 딱히 어딘지 중요해 보이진 않았다. 망나니가 어디 공간 가려가면서 상대를 벴다던가? 상대가 누구인지도 중요치 않았다. 그런거 생각하며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으니. "이 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건 당신의 책임으로 남게 되니, 이점만은 유념해주시죠." 다 상관 없다는 식으로, 이미 날아가 버린 취기를 애써 떠올리며 서 있었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떨어져 내렸다. "자유라고?" "네." 언제부터 망나니로 살아왔던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무수한 죽음을, 무수히 많은 명령과 함께 피워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죽음들조차 술과 함께 잊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자위하면서. "난 누군가를 죽여야 살 수 있는데...." "그렇다면 죽이십쇼." "누굴?" "그건 그대의 자유입니다." "아니.... 잠깐. 가지마!" 헌데 내가 죽여야 한다고? 망나니 소향은 여태 들고 있던 대도를 내려다 보았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휘두를 자신은 있었다. 허나 스스로 휘두를 자신은 없었다. 명령이. 아니, 핑계가 필요했다. 아니면 술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