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LEGENDARY
KOREAN C.V.구자형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염라대왕실타래로 엮일 자격을 묻는 자. 죽은자들의 세계인 명부의 왕 답게 살아있는 자들의 삶 전체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염라는 아기부터 노인까지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세계들을 한 시공간에 펼쳐놓는 스트로크는 어떤 이들에겐 새로운 기회를 준다. 하지만 염라는 준비되지 않은 이들의 만남이 융합이 아닌 혼돈을 일으킬 것이라 걱정하여 스스로 세계 사이의 파수꾼을 자처하였다. 스트로크로 인해 세계선을 넘어온 누군가가 염라를 마주한다면, 염라는 그에게 우주를 넘나들 자격이 있는지 시험할 것이다. "대왕 마마." "왜." "이번에 또 죽은 이들이 늘었단 소식입니다." "그럴테지. 인구가 늘지 않았나." 염라 대왕은 근심 어린 얼굴로 충언을 해대는 노신을 바라보았다. 헤아려 보면 대체 몇 해일까? 저 친구가 그를 섬긴 시간이. 아득하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았다. 그 시간 동안 저승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으나, 이승은 많이도 변했더랬다. "네, 70억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계속 수용을 해야 할지...." "땅은 우리가 더 넓다네." "저들은 아파트라는 곳에 산다고 합니다." "아, 모르고 있었구나. 저기 보게." "산이 있었는데 없어졌네요?" "내 깎으라 일러 두었네. 이번에 이승에서 넘어온 작자들 중에 건설사 하던 친구들이 있어 아파트 좀 지으라 했지." "허어." 그 뒤를 따라 저승도 변하고 있었다. 노신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염라는 이런 변화가 기꺼웠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그저 반복만 하며 보내기엔 그가 지닌 신성이 지나치게 위대하지 않은가. '당황하는 얼굴 좀 보라지.' 내심 신하들이,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들이 그를 따라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네, 이 사람아.' 원래는 내일 또는 내달 혹은 내년에 보여줄까 했더랬다. 어차피 시간은 무한하고 그 무한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것이 염라와 같은 불멸의 존재에게는 가장 중요하니까. '새로운 거야 또 찾으면 그만이지.' 물론 지금껏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무게는 염라로 하여금 무엇보다 지루함을 견디는데 가장 능한 존재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해서 염라는 그로서는 실로 드물게 계획에 없던 짓을 했다. "따라와보게." "네? 어딜...." "삼도천." "황천에요?" 저승의 궁궐에서 삼도천 또는 황천까지의 거리는 그야말로 무한. 허나 염라에게는 별 의미 없는 수치였다. 적어도 저승에서는 그랬다. "아니... 이게...." 노신은 강을 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강이 아니라 그 위에 떠있는 무언가를 보면서였다. 사공이 일일이 저어다 옮겨놔야 했던 배 대신 거대한 철선이 떠 있었다. "이렇게 하면 훨씬 효율적이지. 암만 저승이라 해도 21세기에 나룻배를 탄다는게 말이나 되던가?" "아니, 그래도.... 저승이.... 전통이...." "하하하." 예상대로 노신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염라는 너무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에 즐겁게, 입을 쫙 찢고 웃었다. "으, 으으으으." 그 소리에 강을 건너던 영혼 중 몇이 혼절해 버렸다. "아, 흥이 과했구만." 염라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입을 다물었다. 악한 영혼은 절대로 염라의 목소리를 견딜 수 없다. 그의 파동이 상대의 악함을 건드려 진탕 시키기에 그랬다. 그가 누구건, 얼마나 강하건, 또는 가진 것이 많았건 상관 없었다. 그의 마음에 악함이 있는가 없는가가 염라의 기준이었고, 그것은 곧 저승의 기준이 되었다. "저것들은 재판도 필요없네. 이렇게 멀리서 듣고도 혼절했다면 필시 악인들일 터."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좋아. 음?" "왜.... 그러십니까?" "아, 자네는 들리지 않는가. 하긴 이게 저승에서도 벌어진다면, 내게 벌어지는 것이 맞기는 하겠군." "?" 노신은 또 다시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맞을까? 하여간 염라는 그런 노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지시한 대로 하고 있게. 금방 올테니." "네...?" 그리곤 스트로크에 의해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처음 보는 곳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영겁의 생에 새로운 경험이라니. 기분이 좋았다. "염라대왕. 환영합니다." "님 자를 빼먹었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넘어가마." "네?" "하지만 너와 계속 말을 섞어야 한다면, 그것은 안될 일이다." "어...." 안내자는 염라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서 있기 힘들단 느낌을 받았다. 무릎에 힘이 풀려서 절로 꿇게 되는 느낌이랄까? 실로 볼품없는 광경이었으나, 염라는 오히려 감탄했다. "네 의도가 선하다는 걸 알겠구나." 악인이었다면, 이 안에 악한 마음이 한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쯤 오장육부가 터져나갔을 텐데 멀쩡하지 않는가? "허나 의도가 선하다 해서 늘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 법." 염라는 그런 안내자를 지나 성큼성큼 걸었다. 아직 안내가 끝나지 않았으니 일반적인 존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염라는 염라였다. 한 세계의 왕이지 않나. 걸음의 끝에 왕은 또 다른 왕을 조우했다. 염라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이 곳의 왕인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용어가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여하간 염라는 그렇게 이해했다. 하여 염라는 왕의 자격으로 상대에게 가식없는 첫 인사를 제안으로 던졌다. "내가 자네를 돕겠네." "음...." 그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어떻게 돕겠다는 건가." "내 목소리를 들었다면 알 수 있을 터." "이곳에서도 '분류'를 해주겠다는 게로군." "그렇네.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대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테지." 상대는 잠시 고민했다. '염라가 선한 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비록 얼굴은 험상궂기 짝이 없지만. 해서 선한 이조차 그의 앞에서 벌벌 떨게 되지만. 그의 본성이 악했다면 지금 저승은 저승이라는 말 대신 그저 지옥이라고만 불렸을 터. "좋네. 도와주게." "그래, 잘된 일이군." "잘돼? 아, 그런 의미인가."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염라는 솔직히 긴장했다. 혹 안된다고 할까봐. 스트로크의 의의에 좀 위배되는 제안이지 않았나? 하지만 그의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고, 그 결과 일이 늘었다. '일이 늘었네?' 곰곰히 생각해보면 짜증나는 일이지만 실로 기꺼운 일이기도 했다. 영겁의 삶에 찾아오는 새로운 일이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웃지 말게.... 이곳엔 악한 이들도 있으니." "아, 실례했네." 염라는 몇몇 혼절하는 이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속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