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SUPER RARE
KOREAN C.V.문남숙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구미호아홉 개의 매혹과 거대한 슬픔.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다양한 SYL에서 그 흔적이 나타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의 끝없는 열망은 매혹과 변신이라는 신통력으로 발현된다. 모두가 더 위대한 존재를 꿈꿀 때 그녀는 홀로 평범함을 갈망하며 인간이 되길 꿈꾸었다. 스트로크로 얽힌 세계에서 이제 그녀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을까. "이쪽으로 갔다!" "다쳤으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게다." 세상엔 전우치처럼 즐겁기만 한 도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전우치가 유별나다고 보면 되었다. 도의 길을 걷는 이 대부분은 즐거움과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으음...." 그들에게 쫓기던 여인은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추어 섰다. 배에 길게 난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보다 흰 얼굴이 마치 어둠 속에 피어난 꽃 같았다. "다들 잘 따라오는구나." 여인은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피보다 붉은 입술에 옥음이 알알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뒤쫓던 도사들조차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신 차려!" 허나 맨 앞에 선 이, 새까만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금부도사(禁府道士) 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기계음 섞인 외침에 흐릿해져 가던 나머지 도사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한낱 요물 주제에 수많은 사람을 꾀어낸 죄가 가볍지 않도다!" 금부도사는 자색 검을 쭉 뽑아내며 외침을 이어나갔다. 저 검에 죽어간 요괴가 과연 몇이던가. 짙은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수십 년은 족히 휘둘러 왔을 것이 분명하 건만, 검은 날 하나 상하지 않은 채 멀쩡했다. 과연 마도 공학의 정수 다운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동류의 학살자 앞에서도 여인, 구미호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어느새 배에 난 상처는 간 곳 없이 아물어 있었다. "목소리가 좀 변했구나." 그녀는 요사스럽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초점을 잃은 이가 하나도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덕이었다. 허나 단 한 사람, 금부도사만큼은 평정을 잃었다. 그의 목소리를 앗아갔던 이가 바로 구미호였기에 그랬다. "이 요물이!" "내 인사가 그리도 싫더냐?" 검을 휘두르며 달려든 도사를 구미호는 그저 손짓 하나로 밀어내었다. 안에 담긴 힘은 웅혼하였으되 밀어냄에는 배려가 가득해서 도사는 그저 몇 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너.... 잘도...!" 도리어 도사를 상하게 한 것은 도사 본인이었다. 분을 못 이기고 기운을 방출하자 검은 정장이 사방으로 찢겨 날렸다. 드러난 상체에는 실과 강철로 기운 흔적이 가득했다. "내 덕에 죽지 않는 몸이 되지 않았더냐. 왜 나를 그리도 미워하느냐." 구미호는 그런 도사를 향해 물었다. 이미 다른 도사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미호의 눈에는 그저 금부도사만 보이는 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내가 언제 그리해달라고 했더냐!" "그리하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난.... 난 그때는...!" "밤마다 속삭이던 사랑은 거짓이었단 말이더냐." 아니,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포위망을 형성했던 도사들을 아홉 개의 꼬리로 감아 저 멀리 던진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 대화를 저들이 듣게 되면 혹 금부도사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아니, 그보다는.... "닥쳐라! 요물아!" 금부도사는 흉험한 검을 구미호의 정수리를 향해 찍어 내렸다. 검에 붙은 추진체에 불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구미호가 서 있었던 땅이 터져나갔다. "어찌하여 나를 해하지 못해 애를 쓰는가." "네놈이 해친 이들 앞에서도 그리 떠들어 보거라!" "배가 열린 채 죽어간 이들을 이르는 것인가?" "그래!" 금부도사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타고난 신력에 더해 구미호가 건네준 요괴의 힘, 그리고 마도 공학이 절묘히 이루어진 그의 검술은 가히 하늘에 닿았다 할 수 있었다. 허나 구미호는 그저 몸을 갈대처럼 흔들어 피해낼 뿐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사람을 해친 일이 없느니라." "거짓말! 넌...!" "정말이니라. 널 다치게 한 이후론.... 보거라. 손톱도 짧지 않더냐." "요물!" 이제 금부도사도 알았다. 구미호는 지금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초조해진 금부도사는 검을 더 거칠게 휘둘렀지만. 구미호는 아까보다 더 가까이에서 그의 검을 피하고 있었다. "그거 아느냐." 이제 금부도사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기에 그랬다. 그에 반해 구미호는 여유가 만만이었다. 여전히 평온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나이 든 네 얼굴도 썩 나쁘지는 않구나." 악에 받친 금부도사의 검에서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출력을 더 높인 까닭이었다. "윽." 이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구미호는 어깨를 길게 베였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허나 마음의 상처는 피할 길이 없었다. 다음 공격을 위해 숨을 고르는 금부도사를 향해 구미호는 물었다.   "나는 그대를 해칠 수 없어 피하기만 하는데.... 그대는 어찌 날 해치려 이렇게 최선을 다한단 말인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목소리와 눈동자 앞에, 금부도사는 곧게 뻗은 검을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 ------ 구미호는 그날 죽지 않았다. 아니, 죽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터였다. 살생을 통해 생을 이어나가야 하는 요괴가 살생을 금해서는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한참 전에 인간을 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요괴를 넘어 신수를 엿보게 된 구미호에게 그것은 비록 쇠약함의 원인이었으되 죽음의 원인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되고 싶다." 허나 이룰 수 없는 꿈을 품는 건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었다. 전우치는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드물게 장난기를 감추고서였다. "그것만은 불가능한 일일세." "어찌하여 그런가. 내 스스로 품은 덕이 적지 않은데." "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외다. 의인을 자처하는 이 중 누구라도 그대보단 못할 것이외다." 경외의 빛을 품은 채였다. 온갖 전설에 빠짐없이 나오는 사상 최악의 요물은, 신수가 되어 눈앞에 서 있었다. 타고난 본성이란 무릇 잠시 억누르는 것도 쉽지 않을진데 구미호는 수백 년을 넘게 그리 살아오고 있었다. 그 결과 명백히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리하면 난 어찌해야 하는가." "나로서는.... 모르겠소." "하아." 구미호는 한숨을 쉬었다. 마치 마지막 숨 같은 처절한 한숨이었다. "대체 왜 그리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가." "그건 말할 수 없네." "나는 알 거 같은데...." "놀리지 말게." 평소의 전우치였다면 놀리지 말라고 하면 더 놀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미안해서 그랬다. 아니, 갸륵하다고 해야 할까? 대체 안에 품은 사랑이 어떠하기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 그 사랑을 헤아리려다 보니, 얼마 전 우연히 엿보았던 불가해가 떠올랐다. "뭐지?" 구미호는 전우치의 장난스런 눈동자에 깃든 신비를 눈치챘다. 해서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우치는 그런 구미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스트로크. 그 현상을 경험한다면.... 혹 방법을 알게 될런지도 모르지." "스트로크? 그건 인간들을 위한 현상 아니더냐." 인간을 말할 때마다 구미호의 얼굴엔 처연함이 깃들었다. 이룰 수 없는 바람이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연하여 있기에 그랬다. "아니, 거기엔 잡귀도 저승사자도 있다네." "허. 그것이 정녕...." "내 보기에.... 구미호 중에서도 그대와 같은 이는 다시 없을지니 분명.... 아. 방금 들었나." "들었네. 그럼 나는 가서 뭘 하면 되나." "그거까지는 모르겠네. 내 바람의 끝에 인간이 있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니겠나." "하긴, 그대는 이미 내 꿈을 태어날 적에 물려받았네." 구미호는 그 말을 끝으로 전우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전우치는 얼마간 그녀에 대해 묵상했다.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난 그 인간을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골몰했었는데.....' 필멸의 삶을 동경하는 불멸자라니. 그 연유에 하찮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니. 이처럼 얄궂은 일이 또 있을까. '하여간에 응원은 하겠네.' 전우치는 고개를 이리저리 젓다가, 일전에 금부도사가 요청했던 거울을 깨버렸다. '이제 그는 정말로 강하다네. 아니, 구미호 그대가 약해졌지. 조심하게.' 부디 바람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