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SUPER RARE
KOREAN C.V.김기철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궁예타락한 성자.천년 전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 등장한 승려이자 실패한 지배자. 모두가 왕이 되길 꿈꾸는 시대에서 홀로 신이 되고자 했던 야심가이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그를 타락으로 이끈 것은 우주에 대한 불완전한 통찰이었으나 스트로크로 인해 그의 운명은 새로운 가능성을 만난다. "왔나." 왕건은, 그로서는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돌연 그를 왕성으로 불러들인 이가 바로 앞에 서 있었기에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어전에서 만났어야 할진데, 파르라니 머리를 밀고 안대를 낀 사내는 왕건의 집에 와 있었다. "전하." "입바른 소리." 궁예는 손을 가로 젓고는 왕건을 바로 보았다. 일찍이 전장에 나가 숙적 견훤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져본 적이 별로 없는 명장인 왕건은 어쩐지 손발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또 미륵 타령을 할 작정이신가.' 억지로 궁예를 얕잡아 보기 위해 타령이니 뭐니 하는 단어를 생각해봤지만. 확실히 궁예의 하나 남은 눈에는 그저 무시하기 어려운 열기가 있었다. 아니, 신기라고 해야할까? "왕건, 그대는 역모를 꾀하고 있지?" 그런 궁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넘기기 어려웠다. 역모라니. 신하된 몸으로 이런 터무니 없는 누명이 있을까? '어찌 알았지.' 허나 실제로 반란을 꿈꾸고 있던 왕건에게는 누명이 아닌 발각이었다. "두려워말게. 내 일부러 그대의 집에 찾아온 것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니." "무슨.... 무슨 말씀이온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 궁예라면 마구니가 끼었네 어쩌네 하면서 대번에 목을 베려 했을 터였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 또는 망상으로도 사람을 죽여대는게 궁예 아닌가. 헌데 허심탄회한 대화라니. "그대는 기억나는가. 자네를 한찬 해군대장군에 명하고, 시중에 명했던 때를." 여하간 왕이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뒤를 얼핏 보니 무장한 군인들도 있었다. 이럴 땐 뭐가 되었건 장단을 맞춰줘야만 했다. "기억납니다." "그래, 그때의 기억은 나도 선명하다네." 자세히 보니 궁예는 왕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은 달빛을 머금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그때의 난 확실히 미륵을 닮아 있었네. 돌이켜보게. 당시 내 선택을. 실수가 있었나." "실로 영명하셨사옵니다." 역모를 꿈꾸게 된 왕건으로서도 당시의 궁예는 부정할 수 없는 성군이었다. 아니, 성군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문제가 생긴건.... "난 우주의 기운을 읽어낼 수 있었네." "그건...." "부정하지 않겠네. 나는 왕이 아닌, 신이 될 수 있다 믿었네. 그리고...." 이제 궁예는 하늘이 아니라 땅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번뜩이던 눈엔 어느새 어둠이 넘실거렸다. "타락했지. 정신이 온전한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적네." 왕건은 감히 궁예의 말에 끼어들지 못했다. 평소에도 위엄이 넘치던 궁예일진데, 오늘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아니, 왕건은 이전의 궁예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 때의 궁예는 왕 이상의 무엇이었다. "왕건. 내일이 오면 난 이 날의 대화를 잊을 걸세. 그대를 죽이기 위해 마구니가 끼었다 외치겠지."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궁예는 하늘도 땅도 아닌 왕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비치는 건 빛도 어둠도 아닌 왕건이었다. "죽지 말게. 고작 타락한 내게 죽지 말고. 나를 죽이게." "전하. 어찌 그런 말을...." "입바른 소리는 그만하게, 이미 그대를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내 모르지 않네." "전하!" 왕건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은 함정인가? 이 미치광이 왕이 자신을 떠 보는 것인가? 그런 거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궁예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는 듯 했다. "시간이 얼마 없네." 그리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말하는 중간 중간 신음을 흘려대는 꼴이 흡사 고문 당하는 성군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빠르게 말하겠네. 들을 것은 듣고, 흘릴 것은 흘리게. 그대가 나 대신 왕이 되면, 가장 커다란 적은 역시나 견훤이 될 걸세." 대신 왕이 된다니. 이런 불경할 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허나 왕건은 뭐라 말하는 대신 그냥 들었다. 지금의 궁예에게는 무엇이건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싸우지 말게. 전쟁에는 견훤이 더 능하니.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을 것을 해야만 하네. 나도 그렇지만 견훤도 못할 일이지. 그대는 융합하여 천하를 통일해야 하네. 아자개, 경순왕, 권행, 장길, 김선평.... 끝으로는 저 견훤마저도 품어야 하네." 왕건은 자신을 비추고 있는 궁예의 눈을 바라보았다. 궁예는 달빛을 품고 있는 왕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나라의 미래는 그대에게 있네. 내게는 없네. 난.... 난 미륵이 아니라 타락한.... 괴물일세. 명심.... 명심하게. 그럼.... 이만 가지. 내게 허락된 시간이 다 했으니." 그 눈을 보던 궁예는 애써 미소짓고는 왕건의 집을 떠나 왕성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궁예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 자연히 그의 눈에는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왕건은 잠시 혼란스러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궁예를 잡아라!" 그 날이 있은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왕건은 반란을 일으켰고. "그래, 이리 되어야지." 마침 정신이 들었던 궁예는 홀로 도망해, 왕성을 빠져 나왔다. "어디가 좋을까." 타락한 그는 대체 어디서 죽어야 할까. 불완전한 깨달음을 가지고 감히 신을 참칭한 죄는 적지 않았다. 저주는 육신을 넘어 혼에 미쳤고 더 나아가 묻힌 땅에까지 박힐 것이 분명했다. 난에 의해 죽었어도 왕은 왕이지만, 왕릉 따위는 사치란 얘기였다.때문에 궁예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차후 왕건이 다스릴 땅을 넘어서기 위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기 위해. 그것이 합당한 죽음이라 믿었다. -디리링 그때 어디선가 현 소리가 들려왔다. 우주의 조각이라도 엿봤던 가락이 있어서일까? '이건....' 궁예는 대번에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디리링 그 소리가 가까워 올수록 궁예는 거대한 부름이 있음 또한 깨달았다. '이 죄인을 누가 찾는가.' 궁예는 어쩐지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비록 죄를 지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지만. 신 외에 다른 말로 부를 수 없는 존재에겐 용서 또한 가능할 거 같아서 그랬다. "궁예. 타락한 성자여. 환영합니다." 그렇게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궁예는 어느새 플랫폼에 있었다. 눈 앞엔 그를 불렀던 이 대신 미천한 이가 서 있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안내인. 그대는 이곳에서 자유입니다." "자유라. 그럼 용서해주는 거요?" "용서는 제 몫이 아닙니다. 또한 이곳의 자유에는 늘 대가가 따릅니다." "그리하면 가능성은 있겠구나." 허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지극히 고귀한 자가 저 안내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음을. '죄가 하늘에 닿았음에, 용서 받을 수도 있다 이건가.' 그 존재가 용서를 말하고 있음을. 쉬울 리는 없었다. 여전히 궁예는 하늘을 바라보아도 그저 조각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니. 한가지 나아진 점이 있다면, 타락을 자각하고 부터는 본인이 바라보았던 우주가 얼마나 작은 우주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는 거 정도일까. "그럼 건투를 빕니다." "고맙네." 궁예는 안내인이 이미 사라진 허공을 향해 합장을 한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장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둠이었다. 쫓기던 밤 조차 이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허나 궁예는 도리어 그 어둠 끝에 빛을 보는 듯 걸었다. 느릿하되 망설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