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RARITYSUPER RARE
KOREAN C.V.김영선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한계가 사라진 천재.조선 초기의 천재. 발명가, 공학자, 과학자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한계는 그를 둘러싼 세상이었다. 그러나 스트로크 이후 한계는 모두 사라지고, 그는 이제 500년 전 조선을 넘어 전 우주를 작업대로 쓰게 된다. "출신이 미천한 자이옵니다!" "어찌 천것을 이리 중용하시나이까."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성리학의 나라. 그 외 모든 학문을 천시했던, 그리하여 19세기 말까지도 은둔의 나라로 불리었던 나라. '거참....' 세종은 예지력을 갖춘 자는 아니었으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실학. 그중에서도 과학을 중시해야 이 나라가 바로 설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허나 조선은 신권이 강한 나라. 왕이 독단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지금도 보라. 임금이 총애하는 자를 고작해야 종 3품에 올리겠다는데 이렇게 방자하게 굴고 있지 않는가. "내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 여러 소리 말게나." "하오나, 전하!" "듣기 싫네! 장영실은 이미 혼천의와 간의대에 자격루를 만든 훌륭한 과학자야! 대호 군은 과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자라네!" "전하, 신기한 물건이긴 하오나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 아니 옵니까." 세종은 신하의 말에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혼천의와 간의대로 천문을 읽어 기후를 읽어내는 일이 그저 신기한 일이란 말인가. 자격루로 정확한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 그저 없어도 그만인 일이란 말인가. "그만하게. 내 그대들이 이리 나오면, 장영실을 영의정에 명할걸세." "전하...." "물러가래도!" "전하. 통촉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장영실이 만든 물품을 보며 그 효용에 대해 알아본 적도 있건만. 이들 눈에는 그 효용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리학이 곧 진리라는 생각에 눈이 어두워진 까닭일 터였다. 아니, 어쩌면 그로 인한 특권 때문에 숫제 눈을 뜰 생각이 없을런지도 몰랐다. "장영실을 들라 하라." 세종은 그날의 기억을. 그러니까 장영실을 대호 군으로 명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장영실을 불렀다. "전하, 장영실이옵니다." "얼굴을 들게." "송구하옵니다." "송구는 지랄! 밖에서 떠드는 말일랑 신경 쓸 거 없네!" 오랜만에 보는 장영실은 수척해져 있었다. 딱히 건강에 이상이 생길 일은 없었을 터였다. 세종은 특별히 어의를 붙여 그의 건강을 살피고 있었으니. 그러니 작금의 고통은 소문에 의한 것일게 분명했다. "제가 전하께 짐이 되는 듯 하옵니다." 장영실은 세종의 눈을 마주한 채 이리 말했다. 그런 장영실을 보는 것은 세종에게 있어 고통이었다. '그대는 천재일세, 천재!' 세간에서는 세종을 두고도 천재라 떠들었다. 허나 세종은 장영실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여겼다. 배우지 않고도 이치를 깨우쳐, 종래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이가 천재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천재를 논할 수 있으랴. "걱정 말게. 내가 친히 자네를 보호할 테니." "하오나 전하.... 전하께오선 그보다 중한 일이 많지 않으시나이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한글 말이옵니다. 그것마저도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들었습니다. 제가 부담이 되어 혹 더 중한 일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한글 소리가 나오자, 세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나라말과 문자가 달라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이르지 않았나. 이것은 임금 된 이로써 반드시 교정해야 할 일이었다. 어찌 보면.... 장영실의 말이 맞을런지도 몰랐다. "전하, 소신은.... 이미 과한 은혜를 입었사옵니다. 노욕을 부려 방해가 되느니 차라리 국문을 당해 죽는 게 낫사옵니다." 허나 국문이라니? 죽음이라니? "이보게, 영실. 자네는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제가 고안한 가마가 옮기던 중에 망가진 것은 사실이옵니다." "나는 아직 거기에 타본 적도 없네! 게다가 그것 그냥 스스로 움직이는 가마라지 않았나? 어떤 원리인지 몹시 궁금하다네."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시 제작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미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 들었습니다." 장영실의 말에 세종은 저도 모르게 옆에 쌓아둔 상소 뭉치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장영실을 탓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목을 베라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전하.... 저는 과한 은혜를 입었나이다. 저로 인하여 전하께옵서 곤란해지는 걸 보는 것이 심히 괴롭사옵니다." "그리하여.... 잘못한 것도 없이 죽겠다, 이 말인가?" "어차피 더는 새로운 것을 만들 여력이 없나이다. 제게 발명이 없다면 그것은 곧 죽음인 것을 전하께오서도 모르지 않으실 걸로 아뢰옵니다." 하. 세종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왕권을 강화시켜 놓았건만. 아직도 저것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없단 말인가. "그래, 그것이 원이라면 내 들어줘야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방식은 내가 정할 것일세." 세종은 마음을 굳힌 채, 장영실을 물렀다. 그리곤 상소문에 적힌 대로 국문을 집행했다. 세종은 머리를 푼 장영실을 마주한 채, 신하들의 말을 들었다. "곤장 100대형에 쳐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정면에 선 이를 바라보던 세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간의 공이 있으니 100대는 과하도다. 80대로 감형하여라." 무려 5분지 1을 그 자리에서 깎았다. 허나 신하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곤장 80대라니. 20대 위로는 별 의미도 없지 않던가. 제대로 맞으면 한 대만 맞아도 장독이 올라 죽는 것이 곤장이었다. 뭐가 되었건 죽을 거란 생각에 신하들은 동의했고, 장영실은 곧 형틀에 묶였다. "쳐라." 세종이 명을 내리자, 좌우로 도열한 포졸들이 차례로 곤장을 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 모습을 신하들은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미소는 흐려지고 의혹이 피어올랐다. "예순하나!" "예순둘!" 지금쯤이면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초주검이 되어야 정상일진대 장영실은 멀쩡했다. "전하...." "닥쳐라! 국문 중이다! 네놈이 대신 묶이고 싶으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세종을 단순히 성군으로만 이해했다면 오산이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손자요, 태종 이방원의 아들. 장수의 핏줄이 진하게 흐르는 이었다. 그의 고함에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신하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의금부에서. 사위는 다시금 조용해졌고, 매 세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일흔아홉!" "여든!" 80대를 맞은 장영실은 형틀에서 풀리자마자 일어나 절을 올렸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가 이리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곤장을 만든 것이 그이기에 그러했다. 모양은 곤장이로되 물렁하기 짝이 없어 거의 타격이 없었다. -너는 그 길로 배를 타고 네덜란드로 가거라. 여비는 이것이면 충분할 테니 걱정 말거라. 눈으로 인사를 마친 장영실은 세종의 당부대로 인천의 제물포로 향했다. 혼자는 아니었다. 세종이 붙여준 무사들이 함께했다. ----------- "덕분에 견문을 더 넓힐 수 있었지." 장영실은 관직을 하던 시절 입던 옷과 네덜란드 풍의 정장을 섞어 만든 옷을 걸친 채 말했다. 그의 뒤로는 지난 세월 만들어 낸 발명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것은 여전히 작동했고, 어떤 것은 망가진지 오래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말 귀한 것들은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허나 네덜란드도 좁다네. 아니, 시간이 부족하다네. 시간이 더 허락한다면.... 이것들을 완성 시킬 수도 있으련만...." 앞에 놓인 건 그저 종이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설계도였다. 네덜란드 아니라 유럽 최고의 과학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선과 수가 수없이 적혀 있었다. 장영실은 확신했다. 이중 하나라도 완성이 된다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아니, 진보라고 해야 할까? "아." 허나 장영실이 앞두고 있는 건 진보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제아무리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해도 천수를 누린 다음엔 응당 죽어야 했다. 그것이 하늘의 순리이지 않나. 하여 장영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 했다. -디리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필시 그리되었을 터였다. "여긴...." 여느 소리였다면 필시 죽었을 터였다. 허나 소리는 어떤 힘이었고, 그 힘은 장영실을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환영합니다. 장영실." 흰옷을 입은 안내인의 말에 장영실, 늙은 천재는 돌연 자신의 머리가 다시 검어졌다는 걸 눈치챘다. "이게 대체...." "이곳은 플랫폼. 이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다만 선택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유념하시길...." 장영실은 안내인의 말을 듣는 대신 플랫폼을 관찰했다. 그는 그의 불가해한 이해력으로 말미암아 플랫폼의 조각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이곳이 영원한 곳이 아님을 알았다. "시간이 얼마나 있소." 안내인은 예상한 질문이 아님에 그대로 사라지는 대신, 입을 열었다. "그것 또한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아. 그렇군. 그것으로 되었소." 장영실은 사라지는 안내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플랫폼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여태 보아오지 못했던 것이 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라면 뭐라도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잠시 장영실은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평생을 지내던 조국. 한 번의 죽음 이후 시간을 보낸 이국. 그 어디에서도 완전한 자유는 없었다. 그저 자유롭게 탐구하고 연구하며 뜻을 펼치기에는 언제나 그의 삶은 곧 굴레였다.  하지만 이 느낌은 무엇일까.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무력한 느낌일진대, 왜 이것이 무한한 자유로 느껴지는 걸까. 두려움을 반려 삼아 평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이 공간이 주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오히려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이렇게 넓은 작업대라면, 못 만들게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