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고르자브종
RARITYSUPER RARE
KOREAN C.V.정재헌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혼돈이 낳은 견왕.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리의 잡종견. 그러나 여러 우주가 공명하는 실타래의 세상에서 혈통의 순수함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 섞이는 길 위의 혼돈 속에서 미천함이 모여 결국 무한한 생존력의 상징이 되었다. 실타래의 여러 존재들도 이와같이 서로 융합될 수 있을까. "이건 똥개 아니에요?" "개가 다 개지 그럼." "아니...." 철수는 할머니가 들이민 족보 없어 보이는 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족보만 없는게 아니라 슬쩍보니, 할머니 집에는 엄마 개만 있는 거 같았다. 필시 아빠 개는 모르지 않을까? 동네 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거 같았다. 저 엄마개, 동네 맨날 뽈뽈 거리면서 돌아다니거든. "난 좀 족보 있는 개가 좋은데...." "우리집 족보도 샀는데 개 족보는 무에 소용이야." "우리 한산 이씨 아니에요?" "생각을 해봐라. 한산이 충청도 지명인데 왜 너는 고향이 강원도겠어. 그냥 마을 촌장님이 어느날 다 불러 모아서 우리는 인제 한산 이씨다 라고 한거지." "아, 그래도...." 철수는 입을 비죽거렸다. '친구 중에 똥개 키우는 사람은 없다고요....' 솔직히 시츄만 해도 얼마나 귀엽나. 말티즈도 그렇고. 아니, 무엇보다 나중에 커서 무슨 모습이 될지 딱 예측이 된다는게 좋았다. '부모님들도 애가 나중에 뭐 될지 딱 알고 키우면 덜 힘들걸?' 일단 혈통이 있는 개는 귀엽거나 멋있기도 하지만 불안을 없앤다는 측면에서도 안심이 되었다. 그에 반해 지금 철수 앞에서 꼬리를 뒤흔들고 있는 똥개는 어떤가. 나중에 뭐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멍청하게 밖을 보고 있는 엄마개처럼 될까? 그것조차도 의문이었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니까. "야, 주접 떨지 말고 그거 라도 받아서 키워. 아니면 그냥 못 키우게 한다?" "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도 별 소용은 없었다. 철수는 아직 어렸고, 돈도 없었다.해서 데리고 왔다. 똥개를. 이름? 시골잡종이었다. "잡종아~" "너 진짜 그렇게 부를거야?" "그럼 뭐라고 해." "성의 있게 지어봐." "아들 이름 철수라고 지은 아빠 말이라서 잘 안들리는데." "음." 철수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소파에 앉았다. 어머니도 말 없이 사과를 깎았다. 철수라니. 이따위 이름을 지어 놓고 개이름은 설마 파트라슈 같은 걸 기대했던 건 아니겠지. "손." 하여간 시골잡종은 하루가 멀다하고 쑥쑥 자랐다. "오." 그리고 말도 잘 들었다. 신기할 정도로. "앉아." 사람 말을 할줄 아나 싶을 지경이었다. "신문 가져와." 철수 말만 잘 듣는게 아니라, 그냥 어떤 말이건 간에 다 잘 들었다. "장 봐와." "엄마 그건 좀 선 넘은.... 쟤 어디가?" "따라가봐. 마트 가는거 아니니?" "카드 물었어. 미친...." 심지어 장도 봤다. 음식도 영양가 있게 잘 담아왔다. 계란에 뿌리 채소에 소고기에 버섯에....균형잡힌 식단이었다. "요리도 시켜볼까...?" "아니, 엄마...." "농담이야, 농담. 아니, 근데 얘는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이러지?" "그러니까. 음...." 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까지 봐온 시골 잡종, 그러니까 그의 애완견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외형도 처음 데려왔을 때랑은 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강아지라기 보다는 완연한 성견이라고 해야 할까? 기껏해야 3개월 밖에 안되었는데, 정말이지 놀라운 성장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시골잡종도 철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주인은.... 어떻게 봐도 똑똑한 인간은 아냐.' 시골잡종은 알고 있었다. 그가 장 봐오는 시간 동안 철수가 했어야 하는 학습의 양을. '저번 학원 테스트.... 반에서 꼴찌하지 않았나.' 듣자니 옛날에는 과학고가 목표였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인문고가 목표가 되었다 했다. 공부라고는 안하고 있으니 아마 좀 더 하향 조정될 거 같았다. "어어. 어디가. "쟤 요새 화장실 가서 싸더라. 변기에." "변기에?" "응.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시골잡종은 능숙하게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았다. 다 큰 개가 남들 앞에서 엉덩이 까고 배변 활동을 할 수야 없지 않겠나. '하여간.... 이제 슬슬 동네 순찰이나 해볼까.' 시원하게 장을 비우고 나니, 주인에 대한 걱정도 조금 사그라 들었다. 막말로 저 놈 인생이야 저 놈 알아서 해야 할 문제 아닌가. 시험을 대신 봐줄 수 있다면 과고 아니라 영재고도 보내줄 수 있겠지만. 그건 반칙일 터였다. -끼이익 이런거 생각하면 철수 아빠처럼 머리가 빠질 수도 있으니, 시골잡종은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안쪽에서 여는 건 버튼 하나면 되니까. 밖에서도 비번을 알아서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월." 시골잡종은 빌라를 빠져 나와 골목 어귀에 서서 짖었다. 그리 크게 짖지는 않았다. 그랬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곤란하니까. "멍." 그 부름을 들은 다른 강아지 하나도 나지막히 울었다. "왈." "컹." 그 울음은 동네 전체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울음을 들은 개들 중 상황이 허락하는 것들은 죄 시골잡종 앞으로 모였다. 시츄나 말티즈는 물론이거니와 세퍼드나 도베르만 같은 맹견들도 끼어 있었다. 시골 잡종은 그들 앞에 당당히 서서 물었다. -별일 없었지? -어제 취객 하나가 누워 있어서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잘했네.도베르만은 심지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꼬리까지 살살 흔들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지독한 투쟁의 세월이 있었다. 둔한 주인 놈은 모르지만, 시골잡종에게는 이마에 자잘한 상처가 제법 있었다. 모두 여기 있던 놈들과 한바탕 하다가 얻은 것들이었다. "으릉?" 그때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시골잡종은 아연했다. 개들이 어떤 존잰가. 소리에 민감한 애들 아닌가. 분명 이 중에는 유전적으로 그보다 더 청각이 예민한 애들도 있는데, 기색을 보아하니 소리를 들은 건 자기 뿐인 듯 했다. '이상한데.... 이 소리....' 게다가 소리가 대체 어디서부터 들려온 건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반복될 때마다 소리가 커져가고 있다는 점 뿐이었다. -디리링 그리고 그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을 때, 시골잡종은 처음 보는 곳에 서 있었다. "환영합니다, 시고르자브종." 흰 옷을 입은 사람이 그를 향해 말했다. 시고르자브종이라. 시골잡종의 다른 발음일 뿐이지만. 그 모호함에서 오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는 어디.... 어? 나 말을 할 수 있네." "이 곳은 플랫폼. 이 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자유라. 주인에게서의 자유라면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닌데." 모자라는 주인일지언정, 유대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고르자브종은 주인이 위험해진다면, 목숨을 바쳐 구해낼 용의가 있었다. 반대의 경우가 절대 성립될 수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를 테면 개의 태생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걸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대의 선택이 자유라는 겁니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요?" "번식." "네?" "짝짓기를 하고 싶다." "아...." 안내인의 얼굴이 좀 애매해졌다. 음담패설을 내뱉는 개라니. 안내인 노릇하면서 별 꼴 다보긴 했는데. 이런걸 예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또 다른 잡종을 만들고 싶다." "응?" "재밌지 않나. 매번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건. 그렇게 뒤섞이다보면, 요즘 인간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는 스트로크의 선택을 받는 개도 나온다는 걸 내가 증명했으니.... 내 다음 대에 이르게 되면 어떤 놈이 나올지 알 수가 없지." "아...." 음담패설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인 내용인가 싶었다. "이쁜 개가 여기 있나?" 아니, 그냥 음담패설 같기도 하고...? "뭐가 되었건, 내 자유라 이거지." 시고르자브종은 꼬리를 세운 채, 총총 걸음으로 플랫폼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다양한 냄새가 나는 것이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