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RARE
KOREAN C.V.최 한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각시탈얼굴을 가린채 약자를 지키는 영웅.지배당하는 동족을 위해 홀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무술의 고수. 약자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소망은 아무런 명예와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언제나 고독과 슬픔이 담긴 가면(각시탈)으로 가려져 있다. 경성. 여름의 경성은 무덥기 짝이 없었다. 제국의 수도 동경도 덥다고는 하지만 이 곳은 뭐라고 해야할까. 짜증스러운 더위라고 해야할까? 때문에 김강석, 가네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르륵 가네다는 더위를 피할겸, 또 기분도 풀겸 아무 가게나 찾아 들었다. 들어가다 보니 주렴이 쳐 있는 가게였다. 안그래도 땀이 잔뜩 났는데 주렴 알갱이가 얼굴에 툭 들러붙었다가 떨어지는 느낌에 화가 났다. "에이." 욕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선객들이 그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 소리가 나서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 것일 터였다. 그렇게 가네다를 향했던 시선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반대편을 향했다. 가네다가 입은 옷 때문일 터였다. 아니면 허리 춤에 찬 칼 때문일 수도 있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빠르게 황국에 붙은 가네다는 나름 출세한 사람이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게지.' 겁 먹은 듯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가네다는 비어있는 자리가 아니라, 제일 좋아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이미 선객이 있었으나 별 상관은 없었다. "비켜." "어.... 네." 뺏으면 그만이니까. 약육강식이야말로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 아니겠나? "여기 주문!" 자리에 털썩 앉아서 손을 들어올리니 주모가 달려왔다. 부르면서 생각해보니 돈을 들고 오지 않았다. 괜찮았다. 외상으로 달아두면 되니까. 나중에 갚으려고? 아니. 그럴리가 있나. 주인장도 내가 그냥 조용히 먹고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네, 네." 떨리는 손 좀 보라지. 이 맛에 사는 것 같았다. 기온만 따지면 밖이나 여기나 그게 그거일텐데도 어쩐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걸로. 그리고 고히 한 잔 가져다 주지. 얼음 띄워서." "네." "빨리!" "네!" 가네다는 멀어져 가는 종업원의 엉덩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혹 일본인인가 해서 긴장했다. 기실 이렇게 무례한 인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나. 불안감이 덜컥 들었다. 허나 가네다는 상대의 단정함에도 허름해 보이는 양복에 이내 안심했다.조선인이었다. "넌 뭘봐?" "나 말이오?" "그래, 너." "뒤에 그림을 보고 있었소만." "아니잖아! 날 봤잖아!" 이렇게 되면 거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뭐 먹으려고 온 것도 아니고 기분 풀 요량으로 들어온 만큼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켜 상대에게 다가갔다. 딱히 뽑아본 적도 없는 검에 손을 가져가면서였다. "오해요. 오해. 성질이 급하시구만?" 당연하게도 상대는 겁 먹은 얼굴이 되어야만 할텐데. 눈 앞에 있는 상대는 좀 이상했다. 할 말을 따박따박했다. "뭐? 성질이 급해?" "그렇지 않소? 설령 내가 당신을 봤다해도 뭔 문제가 있단 말이오? 자기 행실에 당당하다면, 이렇게 화날 일도 없지 않소?" 아니,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비판까지 해댔다. '이 놈이?' 주변을 돌아보니 벌써 이목이 쏠린 상황이었다. 개중에는 고소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순사 놈과 기개 있는 조선인의 대립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보아하니 조선 사람 같은데, 일본인 행세는 그만하고. 가서 '고히'나 마시게." 해서 부들거리고 있으려니 상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부끄러움이고. 또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분노였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빼앗긴 강산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독립투사들도 있는데, 자신은 황국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 가네다는 저도 모르게 칼을 빼어 들었다. -기기긱 관리도 형편없이 해둔 까닭에 날카로운 느낌은커녕 둔탁한 느낌만 주었다. "세상에." "저 말종 같은 놈!" 주변에서 욕설이 날아들었다. 돌아보니 조용해졌다. 겁먹은 얼굴만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하고 상대를 봤는데 이 놈만은 달랐다. "이제보니 일본놈이었구만 그래.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이렇게 하는 것을 보니." 숫제 조롱까지 해댔다. "이놈이!" "그래, 베어봐라. 죄없는 양민 베고 행복할 수 있겠나?" "베라면 못 벨 줄 알고?" "제대로는 못 벨 거 같네." "이이익!" 가네다는 못 참고 검을 휘둘렀다 .-깡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뭐가 날아와 부딪치지만 않았다면. "어떤새끼야!" "나일세." "누.... 너... 넌?" 쥐새끼 같은 놈이 돌멩이라도 던졌나 해서 불러보았다. 나서는 이는 없을거라 확신했다. 원래 조선인들이 그렇거든. 남들 뒤에 숨어서는 뭐라 해도 앞에서는 나설 수 없는. 허나 예상과는 달리, 성큼성큼 눈 앞에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각시탈...." 경성 제일의 현상수배범. 이 놈 손에 죽은 순사가 몇이던가. 손에 들린 젓가락을 보고 있으려니 오금이 다 저려왔다. "잠자코 있으려 했더니.... 칼을 뽑아 들더구나." 어째야 한단 말인가. 상대는 젓가락이고 이쪽은 칼이지만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왜 맨손인 상대는 무섭지 않고, 젓가락은 무섭나?" 각시탈은 그런 가네다의 마음을 읽었는지 뭔지 이죽거렸다. 그러자 와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가시오, 선생." "고맙네." "딴데 가서는 객기 부리지 마시고. 큰일 하셔야 할 양반이 예서 개죽음 당할 뻔 했잖소?" "내 명심하지." 그 사이 각시탈은 기개 있던 조선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가네다의 눈이 저도 모르게 조선인 쪽으로 향하려는데, 각시탈이 막아섰다. "네 놈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다." "억...." 동시에 젓가락으로 목을 푹 하고 찔렀다. 가네다의 몸이 모로 쓰러졌다. '이거 하얼빈 역까지 경호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는데.' 각시탈은 가네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 나간 조선인을 따라 나섰다. '기개있는 사람이라더니, 이건 좀 지나치지 않소.' 어느새 각시탈은 벗어 품안에 넣은 후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오히려 맨 얼굴이 눈에 덜 띈다는 걸 알기에 그러했다. ------- "죽은 줄 알았는데." 그가 따라나섰던 것은 안중근 선생만이 아니었다. 조선엔 기개 있는 독립운동가가 많았고, 각시탈은 시간이 허락하는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보호했다. 그러다 총에 맞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런게 있으면 어찌 각시탈을 썼겠나. 다만 아쉬움은 있었다. 아직 조국은 독립하지 못했으니. '내가 너무 한이 남아서..... 잡귀라도 됐나.' 그 와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아니면 삼도천이 이리 생겼나.' 눈 앞에는 사공인가 싶은 이가 있었고. "환영합니다, 각시탈." "저승 인사 한번 멋 들어지는군 그래." 뭐가 되었건 각오했던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고문도 없이 한 방에 죽은 것도 다행인데, 저승이라는 곳이 이리 예의바르고 깨끗할 줄이야. 망국의 자손에게 허락된 저승치고는 지나치게 좋았다. "그대는 죽은게 아닙니다." "무어라?" "이 곳은 플랫폼입니다." "정거장이라고?" "일종의 정거장이죠. 이 곳에서 당신은 자유입니다. 어떤 선택이건 할 수 있죠. 다만 각각의 선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저승인줄 알았을 때보단 아무래도 더 혼란스러웠다. 뭔 개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안내인이 말을 보탰다. "기회로 여겨도 좋습니다. 그대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엔 그대를 도울만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으음.... 내 꿈은 독립인데 그걸 도울 수도 있단 말인가?" "자신의 꿈을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내가 조국의 독립이 아닌 다른걸 꿈꾸기라도 한다?" "글쎄요. 어쩌면 조국이 아닌, 더 중요한 것을 독립시킬 수도 있을 일이지요." 영문모를 소리였지만,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에 신경이 쓰였다.  수많은 독립투사, 조국의 영웅들을 호위하면서 가장 자주 느꼈던 것은, 일종의 목적의식이었다. 정작 자신에게는 목적의식이 자리할 자리에 텅 빈 공허만 들어차 있었기에, 오랜 시간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미천한 무력을 사용해서 타인을 돕고 기개있는 양반들을 보호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선 의문이 들던 터였다. 그러다 이상한 곳에 떨어져, 정체모를 상대에게서 영문 모를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상대에게서는 그토록 오래 찾아다니던 목적의식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좋소. 뭐든 하지." "그럼 건투를 빕니다." 안내인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각시탈은 탈을 매만졌다. 사방은 여전히 낯선 풍경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수도 없었다. 허나 돌이켜 보면 탈을 쓰고 난 후의 그의 생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너무가 강대한 황국을 상대하기에 각시탈은 그저 개인이지 않나. 모든 선택이 의문이었고 또 혼란이었으며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다를 것도 없겠구만.' 해서 각시탈은 여느 독립운동가가 그러했듯, 두려움을 애써 갈무리한 후 앞으로 걸었다. 이 모든 일 끝에 독립이 있다면, 그는 못 할 것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의 독립이건간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