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RARE
KOREAN C.V.한경화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심청용왕을 감동시킨 소녀.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바다에 던져진 소녀. 소중한 사람을 보호할 힘이 없는 자의 마지막 선택은 자기희생이지만 때때로 작은 존재의 희생은 위대한 신을 감동시킨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산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풍랑을 일으킬 테니, 상인들이 쌀 삼백섬에 널 샀다?"
용왕.
서해를 관장하는 존재는 인상을 썼다.
그래서일까?
여의주에서도 음산한 빛이 새어 나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본디 용이란 선한 존재이기에 그러했다.
까닭 없이 누군갈 해하는 일은 없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지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며 복장이 터지는 것도 당연했다.
세상에 산 제물이라니.
용왕은 어이가 없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날 뭘로 보고...."
어린 소녀, 심청은 그런 용왕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생긴 것도 험상궂게 생겼다.
지금 당장 저 입을 쩍 하고 벌리면, 자기 하나쯤은 꿀꺽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허나 용왕은 입을 벌려 심청을 삼키는 대신 그저 탄식만 내뱉었다.
"날 모함하고 다니는 거야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만.... 널 던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고."
심청은 헷갈렸다.
실제로 풍랑이 몰려오다가, 몸을 던지고 나니 바다가 잔잔해지는 걸 봤기에 그랬다.
"정신없이 널 구하느라 바람과 싸우긴 했다만...."
그러다 용왕의 넋두리를 듣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다 오해였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심청은 몸을 던졌고, 숨은 끊어진지 오래였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건 그저 용왕의 배려 덕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변덕이라 여겼는데 듣다 보니 배려 같았다.
"여하간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기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몸을 던진 딸이라니. 우선 몸을 일으키거라."
용왕은 혼란스러워하는 심청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 순간 심청은 알 수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던 육신에 피가 돌기 시작했음을.
"어...?"
동시에 여의주의 빛이 사그라들었음을.
"놀라지 말거라. 일 년에 한 번쯤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니."
"제가.... 다시 살아.... 살아 있는 건가요?"
"그러하니라. 너 같은 이가 죽어서야 되겠느냐. 그럴 수는 없는 법이로다."
"가, 감사합니다."
"다만."
용왕은 빛바랜 여의주를 손에 쥐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용왕을 보면서 심청은 올 것이 왔다 싶었다.
그래.
세상이 어떻던가.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이었다.
심청은 늘 선의로 대해왔으나, 세상도 선의로 대갚음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해서 각오를 다지고 있으려니 용왕이 따스한 눈으로 심청을 바라보았다.
"조건이 있노라. 네 머리 위를 보거라."
"네? 어..."
심청은 위를 바라보았고, 빛무리를 확인했다.
여의주에 감돌고 있던 빛과 닮아 있었다.
"아무리 나라 해도 아무나 되살릴 수는 없느니라. 염라가 허락하지 않으니. 다만 의인은 가능하도다. 네가 그 의인임에.... 내 권능 또한 일부 네게 머물러 있을 터인데.... 그 권능을 너와 같은 이에게 써야 할 것이니라."
그 빛은 심청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양이 많지는 않았다.
희미한 빛이 그저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빛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리 적지 않았다.
말 그대로 죽은 사람 살리는 것 말고는 다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
"우선은 네 아버지에게로 가보거라. 아버지의 여생이 다하고, 너 또한 생전의 천수를 누리는 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네."
"그때까지는 내 말을 잠시 잊고, 네 삶을 즐기거라. 네게는 자격이 있으니."
당장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 말, 즐기라는 말에 충실하기로 했다.
해서 아버지와 해후한 후 즐겁게 지내다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버지도, 남편도 먼저 보내고 장성한 아이가 독립하는 것도 보고 난 후 어느 날.
심청은 꿈에 바다를 보았다.
잊혀져 가던 얼굴을 보았다.
"즐거웠더냐?"
용왕.
그가 묻자 잊었던 아니, 잠시 뒤로 접어 놨던 기억이 꽃망울 터지듯 되살아났다.
"네, 즐거웠습니다."
심청의 미소가 기꺼웠던지 용왕도 웃었다.
쥐고 있던 여의주에서도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내 부탁을 하마. 그저 떠돌다가, 너 같은 이를 보면 도와주거라. 언젠가 네 빛이 다하는 날까지만 해주면 되느니라."
"기꺼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게 짐을 지운 거 같아 마음이 좋지만은 않구나."
"아뇨, 즐거운 일입니다. 사람을 돕는 일이니까요."
처음엔 마음이 지극히 가벼웠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떠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왜 용왕이 조금이나마 미안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의인은.
그러니까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심청이 수백 년 가까이 떠돌 수 있었던 것은, 간혹 만나는 의인들이 귀해서였다.
"빨리! 빨리 나가!"
불타는 집에서.
"나는 괜찮으니까 빨리 나가!"
불타는 지붕을 등에 짊어진 채 외치던 이.
심청은 그의 숨결에 뜨거운 공기가 들어가 폐를 삶아버리기 전에 대신 지붕을 짊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살아난 그는, 이상한 마음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서, 어서 타세요!"
가라앉는 배에서.
"나는 여기서도 버틸 수 있으니까! 빨리 타라고!"
튜브의 난간에 매달려 외치던 이.
심청은 그의 체온을 바닷물이 다 뺏어가기 전에 바닷물 대신 그를 감쌌다.
갑자기 밀려오는 온기에 살아난 그는, 이상한 마음에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로구나.'
그렇게 여러 의인을, 희생을 자처한 이들을 살려낸 심청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보다 강해진 빛무리와 함께 감각이 넓어진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희생을 자처하는 이들의 죽음이 적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갈망했다.
저들을 도울 수 있기를.
-디리링
용왕의 보우심일까?
운명처럼 스트로크가 그녀의 귓전을 때리고, 그녀는 곧 플랫폼에 도달했다.
다만 눈앞에 선 하얀 옷의 안내인은 희생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심청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궤적을 살아온 그녀가 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개개인의 바람은 개개인의 몫일 뿐, 플랫폼이 바라는 것은 조화였으니.
"심청, 환영합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그런 무심한 눈빛에도 심청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힘이 강해서?
경험이 많아서?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자처했던 이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나.
'허.... 그냥 어린 소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단호한 눈을 보면서, 안내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지금껏 안내한 이들 중에 걸출한 이가 몇이던가.
그중에서 이런 이가 있었나.
'대단하군. 하지만....'
허나 플랫폼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
심청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빛무리, 용왕이 건네주었던 권능이 사라지고 없음을 그제야 알았다.
"이거...."
안내인은 당황하는 심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플랫폼. 이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다만 선택에 대해서는 대가가 따른다는 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잠깐만요. 저...."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안내인은 그런 심청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저래도....'
잘할 거 같았다.
그에 비해 홀로 남게 된 심청은 당장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인당수에 몸 던질 때만 할까.'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