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RARE
KOREAN C.V.문남숙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장화홍련따로 죽었으나 함께 복수하는 둘.마주한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공포의 존재였으나 이 자매가 기다려온 것은 그저 들어줄 사람이었을 뿐.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때로는 구원의 시작이다. 정동우(鄭東祐)는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엔 그를 만류하기 위해 모여든 친우들이 있었다. "자네, 생각을 고쳐먹음이 어떠한가?" "내 생각도 그렇네. 부임하는 이마다 족족 죽어나가는데 굳이 자네가 갈 일이 무에 있는가?" 정동우는 마치 귀신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이보게들. 그저 우연히 그리된 거 아니겠나." "예끼! 무슨 놈의 우연이 세 번도 넘게 반복된다던가! 게다가 부임한 다음날 죽어나겠네! 이는 필시 귀신의 소행일세!" "자네들이 그러고도 유학자인가? 어찌 귀신을 논한단 말인가." "내 자네가 담이 크다는 건 익히 알고 있네, 허나 그 소문을 증명코자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 말게." 웃어도 별 소용은 없었다. 소문은 이미 진리로 둔갑해 저자에 나돈 지 오래였다. '이거 참....' 정동우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이보게들. 내 글을 배운지도 어언 10년이 넘었으되, 검을 익힌지도 10년일세. 설령 해로운 것이 나타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네." "귀신이 달리 귀신이란 말인가! 검으로 벨 수 없네!" "설령 그렇다 해도 관계없네." "아니, 무슨 말인가?" "내 하늘을 우러러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귀신이 까닭 없이 나를 해할 일이 있겠나?" "그러니 악귀 아닌가!" "에이. 이미 전하께 보고된 일인데 우리끼리 떠들어 무엇한단 말인가. 더 말린다면 이건 불충일세." "아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임금도 팔았다. 그러자 친구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동우는 부임지 철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막상 철산이 가까워오자 살짝 불안해오기는 했다. '정말 악귀가 있을까?' 허나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단 말인가. "어, 어서 오십시오." 하여간에 관아에 들어서자 이방이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귀신이라도 봤나?" 너무 벌벌 떠는 거 같아서 농담을 날렸더니 펄쩍 뛰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였다. "나, 나으리. 무슨 말씀을...." "누구 눈치를 보는 건가.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뭐라도 보이나?" "아, 아니. 나으리! 그러다 진짜 큰일 납니다." "큰일이 나봐야 나한테 날일 아닌가. 세 사또가 죽어나가는 동안 다른 이는 단 하나도 상함을 입지 않았다 들었네." "혹 모를 일입니다요. 정말로요." 오는 길에 불안하다 보니 혹 이방이나 다른 놈들이 나쁜 마음을 집어먹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해서 이방을 찔러봤더니 반응이 볼만했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인데.' 진짜로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나. 뭐가 보이나 해서 시선을 따라가봤는데 죄 허공뿐이었다. 결국, 이방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던 건 하나도 없었다. 별 소득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뜻이다. 다만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 해도 사방이 벌벌 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잠자리에 들 수는 없어서 누워서도 한참을 뒤척였다. -나으리. 그렇게 잠에 들었나 싶을 무렵,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응...?" 단순히 부른 것만이 아니라 흔들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해서 눈을 떴더니 웬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시벌...' 순간 친구 말이나 들을 걸 싶었다. 나왔잖은가. 귀신이! 그것도 둘이나! 해서 입으로 욕을 하고 있으려니 입 다물고 있던 귀신이 말했다. -어, 안 죽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안 죽었다니? 죽으라는 건가? 해서 일부러 가까이 두고 있던 검을 더듬었다. -그거 내가 저기 놨는데. 검은 방문 근처에 있었다. "아." "와, 진짜 안 죽었어." "와."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더니, 둘이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손뼉도 치고 하면서. 그걸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갔다. '약간.... 귀여울지도?' 대신 다른 마음이 들어왔는데, 이것도 어이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여간 잠시 둘이 떠드는 걸 보고 있자니, 그제야 말을 걸어왔다. "아, 저는 장화입니다." "저는 홍련입니다." 소개라. 그래. 귀신도 예법을 아는구나. "나는 정동우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귀신에게 나이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서도, 하여간 보기에 어려 보여서 일단 반말로 응수했다. 다행인지 뭔지 둘은 그리 기분이 상해 보이지 않았다. "저희의 억울함을 해결해주십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하, 원한이었다. 그래. 귀신은 원한이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행복해서 나타나는 귀신이 있다면 그것도 좀 이상할 거 같았다. "얘기해 보거라." 하여간 들어줘야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원한 얘기는 길어지기 마련이기에 자세도 달리했다. "저희의 아버지는 배 좌수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연유로.... 허 씨 부인을 새 부인으로 들였사온데..." 확실히 이야기는 길었다. 그리고 참담했다. 세상에 이토록 어린애들을 학대해 죽이고도 모자라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능지처참에 처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확실히 억울한 일이로다. 허나 내 너희의 말만 듣고서 사람을 벌할 수는 없는 법. 혹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이 있더냐." "네, 있사옵니다." 허나 정동우는 급히 나서는 대신 자초지종을 물어 물증부터 확보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가 밝아오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장화 홍련은 정동우의 처소를 떠났다. "사또... 살아계십니까?" 정동우는 일부러 그대로 잠드는 대신 이방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살았네." "에그머니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곤 재수사를 지시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허 씨 부인은 잔인하고 간악한 자이긴 했으나 그리 철저한 사람은 못 되는 편이라 증거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의심하고 달려드니 검거는 금방이었다. "사, 살려주시옵소서.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 "실수라? 누가 실수로 사람을 죽인단 말이더냐." 정동우는 허 씨 부인과 그 양옆에 선 장화, 홍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둘은 그의 눈에만 보이는 듯했다. 지금은 그랬다. "자,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왜 내게 용서를 비느냐." "네?" "옆을 보거라." 이젠 아니었다. "어, 어어어!" 장화 홍련은 그리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생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정동우의 눈에는 그랬다. 허나 허 씨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상의 귀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죄악에 기인한 형상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 사또." "가만히 있거라."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죄인 허 씨 부인이 혼자 발작하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방은 두려움 반 의아함 반으로 사또를 불렀고, 정동우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 시켰다. 그리곤 허 씨 부인과 장화 홍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장화 홍련은 그저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허나 허 씨 부인에게는 닿지 못했다. "으아아악! 안돼!" 그녀는 그녀의 죄업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사, 사또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천벌이 아니겠느냐." "처, 천벌.... 혹 귀신의 소행은 아, 아니겠죠?" 이방은 벌벌 떨었다. 첫날처럼. 정동우 또한 첫날처럼 웃었다. "귀신은 얌전히 서 있느니라." "무, 무슨...." "저기 안 보이느냐." "으어." 그의 말에 이방은 혼절했으나, 정동우 외에 그 일을 목도한 이는 없었다. 저절로 찢겨 나가는 허 씨 부인을 보느라 그랬다. 천벌. 그래, 이것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있을까. 사방은 허 씨 부인의 비명, 종래에는 신음으로 가득 찼다. "만족했느냐." 허 씨 부인은 사지가 찢기고 나서도 죽지 못했다. 사또 정동우는 짚이는 바가 있어 장화 홍련에게 물었다.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과하나이다." "그래, 그리하면 됐다." 둘의 답이 있자, 허 씨 부인의 신음이 멎었다. 그 죽음을 장화 홍련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걸 보면서 정동우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허 씨 부인이 들을 줄 아는 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단 사실을. 허나 그녀는 듣지 않았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들어주는 어른이 있으니까. 정의가 실현되었고, 둘의 이야기는 장화 홍련전이 되어 모두에게 들려지게 되었으니까. -근데 왜.... -왜 그랬어? 끝은 나지 않았다. 책으로, 영화로,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도 또 다른 장화, 홍련은 계속해서.... 학대받는 아이들의 얼굴로 끊임없이 죽고 또 죽었다. 정동우처럼 들어주는 어른은 더 이상 없었다. -나도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그러니까 들어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장화 홍련은 알 거 같았다. 이대로라면,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그저 무수한 등장인물만이 나타날 거라고. -디리링 무수한 등장인물이 또 다른 장화 홍련이 되어 죽어가는 영원의 시간 끝 어느 지점에서도 자매에게 스트로크의 부름이 도달했고, 자매는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작게나마 세상을 바꾼 자매는, 이제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영향력을 이곳에서 행사할 수 있을까.  장화 홍련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끝이라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