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RARE
KOREAN C.V.홍진욱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사명대사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신념을 꺾은 승려.생명을 살리기 위해 살생을 택한 조선시대의 전설적인 의병장. 파르라니 깎은 머리. 맨몸에 걸친 장삼과 가사. 그리고 손에 돌린 산장. 승려 사명은 눈 앞의 참상에 한숨을 쉬었다. "하...."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버린 아이. 그 아이를 덮고 죽어간 어미. 문가에 하늘을 보고 누워 죽은 아비. 비단 이 집만의 풍경은 아니었다. 고을 전체에 죽음이 가득했다. "아미타불...." 뒤따르던 제자 하나가 눈을 감고 염을 외웠다. "내세에는 부디...." 또 다른 제자는 명복을 빌었다. 오늘 지나쳐 온 마을만 벌써 세 곳. 살아있던 자가 있었나?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죽음만 가득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겠구나." 사명은. 사명은 석장 대신 칼을 들었다. ----- "스승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밤이 깊었다. 자자." "오늘은 주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모르겠구나." 사명은 칼을 놓고 석장을 든지 오래였으나 여전히 칼 들고 지내던 시절에 붙들린 기분이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아니, 잠에 들기가 어려웠다. "스승님! 앞에 왜놈들이!" "다 죽일 놈들이다. 준비하라." "네!" 사명이 승려들을 이끌고 달려가자, 일본 병사들 또한 칼과 창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한 채 맞서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사나운 것은 역시나 칼로 무장한 장수들이었다. 사무라이라고 하던가? 저것들은 한놈만 무리에 난입해도 큰일이었다. 맞붙게 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여럿이 죽거나 상하게 될테니. -쾅 사명은 들고 있던 칼로 땅을 내리 찍었다. 그러자 일본 군이 뛰어 오던 쪽 땅바닥이 뻘이 되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사, 사명이다!" "웬 중놈들인가 했더니...." "도, 도망가라!" 무릎까지 쩍쩍 들이차는 뻘에 갇힌 일본군들 중 일부는 전의를 상실했다. 게다가 이 요술을 펼친 이가 사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나머지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했다. 마구잡이로 들고 있던 무기를 던져대는 이들도 있었다. "다. 다 죽여라." 허나 사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칼로 상대를 베었다. 제자들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선장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칼로 베고. 승려들은 마치 백정처럼 능숙하게, 또 착실하게 상대를 몰살시켜 나갔다. "이.... 이 악독한...!" "사, 살려줘!" 일본군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 전쟁 초기였다면 사명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살생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허나 망설임은 곧 민초들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착각일수도 있었다. 사명의 자비와 고을의 전멸은 아무 관계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혹시 내가 그들을 죽였다면, 고을이 멀쩡히 남아 있지 않았을까? 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고 부터는, 사명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다친이는 없더냐?" "네, 스승님의 술법 덕에...." "다행이구나." 그저 묵묵히 죽였다. 그가 그러자 제자들도 말 없이 따랐다. 그러던 어느날 사명은 제자가 들고 있던 석장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왜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눈에 들어왔다. 한때 사람이었던 것의 피와 살점이 잔뜩 묻은 선장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걸치고 있던 가사로 툭툭 닦아 내던 제자. "으, 으으으으으!" 사명의 꿈은 늘 그렇게 끝났다. "여기 물 있습니다." 제자도 익숙하다는 듯 미리 떠다 놓은 물을 사명에게 건넸다. 매일 있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더 자거라." "네, 스승님." 제자는 다시 자리에 눕고, 사명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였을까. 하늘을 수놓은 별이 흩뿌려진 핏자국으로만 보이게 된 것은. 도저히 하늘을 더 올려다 볼 수 없어 사명은 대청에 걸터 앉아 석장을 닦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을 주어 밀어 닦았는지, 반짝반짝 윤이 날 지경이었다. "스승님." 얼마나 닦았을까. 고개를 돌아 보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 "오늘도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할 일도.... 음." "스승님? 어찌 그러십니까?" 제자는 사명이 그나마 낮에 잠시나마 잘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어지간하면 일정을 잡지 않고 있어, 일정도 사명이 말한대로 널럴한 편이었다. 때문에 방금 사명의 반응은 여상한 것이 아니었다. 해서 물으니, 사명은 기묘한 미소와 함께 절 밖을 내다 보았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모양이로구나." "손님이요?" 귀한 손님이라. 제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락도 없이 누가 온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명의 인맥이 보통을 넘는 다는 것, 또 스승의 법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에 제자는 급히 손님 맞이에 나섰다. 그래봐야 별 거 없긴 했다. 그저 앞으로 달려가 오는 길을 살피는 것 뿐. "그럴 필요 없느니라." 해서 길이라도 쓸려고 빗자루를 잡았더니 사명이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스승님, 한동안 오가지 않아 길이 엉망입니다." "오늘 오실 손님은 걸어오지 않을 모양이니 괜찮다." "네에?" 점입가경이라더니. 더 이상한 얘기만 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온다는건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 타고 올만한 양반도 있긴 했다. 세상 어떤 말이 이리 험한 산골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사명은 의문에 찬 제자를 향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바람 타고 올 손이니 걱정말거라." "네?" 제자는 슬며시 허준을 떠올렸다. 잠을 못잔다 싶더니만 드디어 어떻게 된게 틀림이 없었다. 세상에 바람 타고 온다니. '스승님....' 벌써 잘못되면 안됩니다. "스승님?" 하여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사명이 어느새 모로 누워있었다. "내 잠시 어딜 다녀 올테니.... 나중에 보자꾸나." "네?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사명은 당황한 제자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짓다가, 진해진 음악소리와 함께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아." 천지 사방이 깜깜했다. 눈 앞에 선 이만 빼고는 그랬다. 흰 옷을 입고 있던 상대는 다가와 입을 열었다. "석장 대신 칼을 든 승려 사명. 잘 오셨습니다." "네, 이곳은.... 대관절 어디입니까?" 누가 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이런 곳에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특히 온통 깜깜한 곳이라는 것이 사명을 괴롭게 했다. 어쩐지 밤과 죽음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이곳은 플랫폼.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입니다." "폴래품(乶來品)?" "외래어니 애써 이해하려 하지 마시죠.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말 뿐이니." "모든 가능성이라...." 사명은 모든 가능성이란 말에서 단 하나의 바램만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제가 다시 승려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승려가 아닌가요?" "살계를 범한 중이 어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자처하겠습니다. 불초는 파계승일 뿐입니다." "파계라... 그 또한 그대의 선택이었겠죠?" "그렇습니다."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다시 살계를 범할 겁니까? 아니면 달리 사시겠습니까?" 안내자의 질문은 그저 평범해 보였지만 사명에게는 뜨끔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늘 품고 있던 생각이었기에 그랬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허면, 쉽지는 않은 길이 될 거 같습니다만. 모를 일입니다. 그대가 칼 대신 석장을 들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아." 길이 보인다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허나 해묵은 밤에 동이 터오듯, 저 멀리 한줄기 빛이 비쳐 오는 느낌이었다. '칼 대신... 석장이라.' 사명은 그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마련한, 매일 닦아 윤이나는 석장을 내려다 보았다. 모양은 석장이지만 실은 칼이었다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석장이 될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그럼.... 그대의 앞 길에 고요가 가득하길." "아?" 고요? 익숙한 인삿말에 고개를 올려다 보니 이미 흰옷을 입고 있던 존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잔상 같이 남아 사명의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 같은 이를 늘 응원한다네. 사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