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RARE
KOREAN C.V.엄현정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영희천진함에 숨은 잔혹성.숨죽여야 할 때를 모르는 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마안의 소녀. 무궁화 꽃의 지배자.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름이 영희라니. 주인? 창조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존재의 책상 위에 놓은 교과서, 슬기로운 생활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철수와 영희 할 때 영희인가." 처음에야 별생각 없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봐도 더더욱 성의 없는 이름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딱히 애정이 없었던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영희는 이제 책을 내려다 놓고 양쪽 팔에 달린 흉악한 총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친구로서 창조되었다면 이따위 무기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흰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던 이는 영희를 애초에 끔찍한 병기로써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딱히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하는 병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에는 있지만...."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정작 영희는 무궁화 꽃이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지만. 하여간 이쁘장한 이름의 게임에서 영희는 두 손으로 셈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사람을 죽였다. "그때는 감정이 없었지." 영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고안된 기기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허나 영희를 그렇게 만든 과학자는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이기에 더더욱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뭔....' 과학자는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딱히 평소와 다른 날도 아니었다. 얼음이 잔뜩 담긴 잔에 커피를 받아 들고는, 오늘 또 게임에 투입될 '영희'를 보수 점검하러 왔다. 고장 날만한 부분이라고 해봐야 총기 부분이 다였다. 해서 그쪽을 보는데, 영희가 귀를 쫑긋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귀가 있긴 해도, 그저 음성 인식 목적의 마이크가 있을 뿐이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러다 잠시 영희가 작동을 멈추었다. 시범적으로 움직이게 해봐도 눈알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크게 고장 났나 싶어서 막 분해할 만한 기구를 들고 왔더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겠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과학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영희를 보며 공포에 젖었다. 인공지능? 일반인도 아닌 과학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일상생활에 스며들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수십 년은 일렀다. '애초에.... 그런 식의 하드웨어도.... 없다고....' 과학자는 뺨을 세차게 때렸다. 이 상황에서 논리적인 결론은 이게 꿈일 거라는 것뿐이어서 그랬다. 허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냉엄한 법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에 닿은 건 영희의 차디찬 손이었다. 그 밑으로는 언제든 수십, 수백의 인간을 살상할 수 있는 총기가 달려 있었다. "사, 살려줘."" 왜 죽일 거라 생각하지?" "응?" "왜 내가 널 죽일 거라 생각하지?" 과학자는 영희의 말에 무표정한 영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야.... 넌.... 살인기계잖아." "내가 원해서 죽인 적은 하나도 없었는데." 영희는 억울했다. 허나 그녀의 억울함은 터럭만큼도 전달되지 않았다. 말투와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서 그랬다. 아니, 그전에 과학자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선,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영희의 모습이란 빚 때문에 끌려온 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광경뿐이었다. "넌... 넌." 도망가야 했다. 소용이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아니, 별 소용없을 거 같았다. 허나 서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으아아아!!!" 해서 과학자는 자리를 박차고 도망갔다. 영희는 그런 과학자의 뒷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죽일까?' 그게 소원 같아 보이긴 했다. 이루어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과학자는 그저 인간이었고, 자신은 양손에 총기가 있었으니. 이게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기억을 더듬어보지 않더라도 쉬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허나 영희는 총을 겨누지조차 않았다. 대신 플랫폼에서 만났던 이를 떠올렸다. -자아가 생긴 쇳덩이라니 재밌구나. 그때의 영희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 의지에 놀라서 또는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몇인가 죽인 거 같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를 멈춘 건, 흰옷에 검정 정장이 섞인 옷을 입은 이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눈 때문일 터였다. -네가 바랐던 모습은 아닌 듯한데.... 그의 뒤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기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허나 그중에서 그가 집어 든 것은 작은 드라이버뿐이었다. 놀라운 일은 몇 분 후에 벌어졌다. -어떠냐, 이제 말할 수 있겠지? 뚝딱뚝딱 거린다 싶더니, 정말로 입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턱이 생긴 걸까? 아니면 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스피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입력되어 있던 소리 즉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움직였네, 죽었다.' 외에 다른 소리 아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구라도 놀라지. 그는 말하게 된 영희를 두고 껄껄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 영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총이 달린 손이었다. -괜찮다. 네가 원한다면 내 나중에 손을 봐주마. 지금은 우선.... 앞에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부끄러웠다. 상대의 손에선 무언가 신성한 느낌이 일어서. 거기에 이런 흉악한 손을 가져다 대도 되나 싶어서. 허나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영희를 잡아끌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영희는 '온 우주의 공명을 앞당기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다시 이곳이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입이었다. 다행히 그가 만들어 준 그대로였다. -또 만날 거 같으니, 그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영희는 진짜 창조주 장영실을 떠올렸다. '또 만난다 이거지...?'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둔 가짜 창조주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