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RITYCOMMON
KOREAN C.V.김용준
STORY한산이가 & 이종범
꼭두쇠발붙일 곳 없는 곡예단을 이끄는 자.떠돌이 기예단인 '남사당패'의 우두머리. 갈 곳 없는 자들을 모으고 지키며 다스리기 위해서는 험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제는 꽤 큰 공연이 있었다. 사또의 생신 잔치에 불려나가 재주넘기도 하고, 줄도 타고 했으니 '큰 공연'이라는 말도 과한건 아닐터였다. 적어도 꼭두쇠는 그리 여겼다. 때문에 해가 창호문을 뚫고 정수리에 내리쬐기 시작한 지금도 그저 자리에 누워 뭉개고 있었다. -찰싹 가만히 있지는 못했다. 날이 제법 추워지는 시기다 보니 따뜻한 구들장으로 온갖 벌레가 꼬여서 그랬다. 다 잠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이 새끼 이거." 빈대는 달랐다. 아까운 피를 어찌나 쪽쪽 빨아 제끼는지. 꼭두쇠는 떼잉 하는 얼굴로 모조리 때려 잡고 있었다. "진지 봐올까요?" 그렇게 애꿎은 방바닥을 후드려 패고 있으려니 주모가 와서 물었다. "진지는 됐고. 주안상이나 내오게." "네." 해서 꼭두쇠는 술이나 더 마실 요량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한번 오라지게 높네." "거 오라진다는 얘기 좀 하지 말게." 옆을 돌아보니 중늙은이 하나가 대청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온갖 애환이 다 담긴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라질 짓을 안했는데 얘기한다고 별일이야 생기겠나." "말이 씨가 되는 법이야. 안 그래도 애들 몇이 지금 내려가 있다구." "제정신 박힌 놈들이면 얌전히 있겠지, 무얼. 당장 어제 관아에 갔다 온 길인데." "제정신 박힌 놈들만 있던가, 어디?" 남사당패의 삶만큼 험악한 것이 또 있을까? 애초에 입당할 때 과거를 묻지 않는단 불문율이 있을 지경이지 않나. 꼭두쇠조차 모두의 과거를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동시에 알만한 작자들이기도 했다. 도망한 노비면 그나마 좀 나을까? 제 주인 때려 죽이고 입당한 인간도 있었다. 눈 앞의 중늙은이가 그러했다. "혹시 자기 얘기는 하는거우?" "이놈이. 나는 이유가 있었다니까." "사연 한둘 없는 죄인이 있나, 어디." 물론 이 인간은 좀 다르긴 했다. 주인놈이 아내를 범해 억울함에 자살해버렸으니. 주인 아니라 무엇이라도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꼭두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눈 앞엔 어느새 주안상이 놓여 있었다. "하여간.... 어디 내려 갔는지는 알구?" "여기 갈만한 데가 얼마나 있겠나. 기껏해야 주막이겠지." "이따 내 가볼터이니 걱정말구 이거나 드시오." 주안상이래봐야 뭐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시골 주막이니 당연한데, 그렇다고 또 엉망은 아니었다. 나름 사또 생신 때 주워온 음식들을 재활용해서 그랬다. "식었구만." "맛은 좋수." "그렇긴 하네. 호강이지, 이만하면. 헌데...." "어째 얼굴이 안좋네. 그리 걱정이 되면 지금 가구." "그래 주겠나? 같이 가세. 내 어쩐지 좀." "그래, 그럽시다, 그럼. 산보겸 갔다오지 뭐." 남사당패 신세에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었다. 중늙은이는 식탐이 있는 편이었고.헌데도 깨작대고 있는 걸 보니 꼭두쇠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아니, 불안하다는 게 옳은 말일 터였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미래도 보고 그런다던데.' 이전 꼭두쇠가 그러지 않았나? 듣자니 혼이 하늘에 가까워져서 영감 같은 걸 깨우친다 했더랬다. "큰일났네, 큰일났어!" 해서 대강 짚신을 신고 나서려는데, 누군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왔다. "왜 그러나?" "아이고, 아이고, 대장. 지금 싸움이 벌어졌네." "싸움? 누구랑." 어지간한 일로 소란을 피울 이는 아니었다. 이 놈도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이니. 꼭두쇠는 발걸음을 서두르며 물었다. 나른한 몸을 깨울 요량으로 호두를 꽉 씹으면서였다. "왈패놈인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어쩐지.... 양반님네 같기도 하구...." "양반? 아니, 양반이랑 시비가 붙을 일이 무에 있어?" "그게...." "네놈들이 기생집엘 갔구나." "그...." "일단 가자."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기생집 출입을 금하는게 어디 돈이 없어서 라던가. 거기서 마주칠 인간들이 무서워서지. '망할.' 기왕 사고난 거 일단 해결부터 하잔 생각으로 내달렸다. 재주 넘기로 단련된 장딴지에 힘이 팍 들어갔다. 그 뒤로 중늙은이와 젊은 사당패 놈이 달렸다. "네이놈들!" 도착하니, 과연 상황은 좋지 않았다. 멋들어진 장포를 입은 놈이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 장검을 빼어 들고 있었다. 막 굴러먹던 놈들이 들만한 검은 아니었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임이 분명했다. "아이구, 나으리 용서해주십쇼! 저희가 눈깔이 삐어서 그만." 부하놈들도 벌써 두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돌아버린게 아닌 이상, 양반이랑 시비터서 좋을 게 있겠나. 하지만 이미 늦은 듯 했다. "비켜라, 이놈들! 내 오늘 피를 봐야겠다!" 잘 보니 눈알이 돌아가 있었다. 취해서인지 아니면 화가나서 인지는 몰라도. 저대로 두면 정말 피를 보게 될 터였다. 아니, 죽겠지. 아마. -깡 꼭두쇠는 앞뒤 잴 거 없이 일단 꽹과리를 던져 양반의 칼을 맞쳤다. "아아아악!" 충격도 충격일테지만 그보다는 소리가 시끄러워 칼을 놓치고 말았다. 서둘러 내달린 꼭두쇠는 떨어진 칼을 걷어찬 후, 외쳤다. "도망가, 이 병신들아!" "네, 네!" 그의 말이 신호탄이 되어 달려들었던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연 인생의 일부를 도망자로 살아온 자들의 집합 다운 순간이었다. 만날 약속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살아 있다면 어디서건 만날테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뿐이었다. "잡아! 잡아, 저 새끼들! 치도곤을 내주마!" 칼 놓친 양반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일행인지 부하놈들인지 모를 놈들이 따라 붙었다. 수가 많은 건 차치하고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필... 저런 것들과...!' 이제 보니 양반 놈도 기골이 장대한 것이, 취하지 않았으면 꽹과리로 칼 떨어뜨리는 묘기는 불가했을 거 같았다. "중늙은이! 흩어져!" 운이 안좋다 해야할까? 꼭두쇠 쪽으로 사람들이 더 달라 붙었다. 아무래도 꽹과리 던진게 못내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쇄액 흩어지려는데, 화살이 날아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퍽 화살은 담장 깊숙히 박혔다. 어중이 떠중이가 쏘는게 아니란 뜻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호랑이 가죽을 걸친 놈이 또 다시 살을 먹이고 있었다. 꾼이었다. 진짜 꾼. "아니, 아닐세." 위험했다. 화살이라니? "뭐가 아냐! 절로가!" "꼭두쇠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지." 저런건 아무리 몸이 날래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재주 넘을 때 쏜살같이 뛰라 가르치지 않나. 쏜살은 그야말로 빨랐다. -쐐애액 또 다시 살이 날아들고, 이번엔 같이 뛰던 젊은 놈 등에 파고 들었다. "으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녀석을 돌아볼 새도 없었다. "저쪽으로 가라고!" 말 안듣는 중늙은이를 보채며 뛰기도 바빴다. "아니, 아닐세." "뭔...." "나 어차피 얼마 안남았어." 중늙은이는 갑자기 달리던 것을 멈추더니, 꼭두쇠를 반대편 골목으로 떠 밀었다. 놀라운 운동신경으로 넘어지는 건 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중늙은이의 최후를 봐야만 했다. "음...." 그는 배에 박힌 살을 내려다 보더니, 이내 꼭두쇠를 돌아보았다. "가게. 덕분에 즐거웠네." "아니...." "가게나. 주인 때려 죽인 놈이 그럼 이리 죽어야지. 별 수 있나." "이런 젠장." 꼭두쇠는 본인이 짊어진 짐을 간신히 떠올렸다. 자신이 없다면 다른 놈들이 어찌 될까. 하루만 그냥 둬도 사고를 이리 치는데. 아마 죄 죽게 될 터였다. 해서 달렸다. 중늙은이의 생을 발판 삼아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뛰고 있었는데...." "환영합니다, 꼭두쇠." 그러다 천지가 개벽하나 싶더니 난생 처음 보는 공간에 와 있었다. "환영이고 나발이고.... 나 가야되우. 애들이 있어." "걱정마십시오. 그쪽에서는 찰나일터이니." "그래두...." "지금은 그대 걱정만 하시죠. 이 곳은 기회이기도, 또 위기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뭘 어쩌라는거우? 근데 이, 이곳은 대관절 어디요?" 낯선 곳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떠돌이로 살아온 생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부하들의 부재였다. 아니, 짐덩이들이라고 해야할까? 누군가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꼭두쇠는 꼭두쇠이기 어려웠다. "이 곳은 그저 그대의 자유를 위한 곳입니다. 속박이 될지도 모르지만." 대장이기에 자유롭다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그저 정해진 답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이런 자유는. 처음이었다.